Keem Jiyoung
“용감하면서도 취약한 수직선”¹이 ‘추상적’이 되기까지
김선옥
P1의 삼면에 〈붉은 시간을 위한 드로잉〉(2020–2022)이 연쇄적으로, 그러나 동일하지 않은 단위로 배치되어 있다. 일정한 질서나 규칙을 따르지 않는 프레임에서 대상은 정교하게 드러날 듯, 드러나지 않는 구성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전하면서도 다르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김지영의 화법은 반복과 치환의 몽타주 과정을 통해 이미지를 (재)구성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를 다시 감각하도록 만든다. 〈붉은 시간을 위한 드로잉〉(2020–2022)은 작가가 대상과 거리두기를 훈련하고 실험하는 과정에 가깝다. 그는 이 연작에서 대상의 윤곽선을 의도적으로 제거하여 형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거나, 혹은 이와 반대로 촛불의 심지와 번지는 빛의 형체를 빠르게 알아볼 수 있도록 묘사하여 대상에 다다르는 속도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대상과 거리두기에 관한 작가의 태도가 적극적으로 달라진 기점은 〈붉은 시간〉(2020–2022)부터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직전의 작업인 〈이 짙은 어둠을 보라〉(2019)는 서로 맞잡은 두 손의 모습을 초를 사용하여 구현한 구상 조각에 가까운 시도였다. 그리고, 〈붉은 시간〉(2020–2022)부터 유화를 매체로 선택하면서 작가의 작업은 점차 ‘추상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만, 추상이 현실 세계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탈피하는 형식이라면, 김지영의 회화는 완전한 추상 형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때로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추상적’ 그림은 언제나 대상을 재현하는 행위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촛불의 모습이 기록된 표면에서 촛불의 심지와 광원은 다양한 밀도와 농도로 때로는 선명하고, 때로는 희미하게 드러난다. 이제 작가가 그린 장면이 어떤 의미인지 묻기보다, 그 이미지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때이다.
P1을 가득 채웠던 다양한 온도의 촛불은 P2에서 불꽃이 열기의 정점에 도달하려는 의지로 빛을 발하는 절정을 향한다. P2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세 점의 〈붉은 시간〉(2022)은 형식적으로 추상에 더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 시각적 경험의 시간을 유예시킨다. 붉은 색채로 균질하게 덮인 평면에서 우리는 길게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색은 그 자체로 형상을 읽는데 선과 면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세 점의 〈붉은 시간〉(2022)이 보여주는 빛의 가장 강렬하고 선명한 부분, 그리고 공간 안쪽에 위치한 〈붉은 시간〉(2022) 속 어슴푸레한 빛의 번짐은 초가 연소하는 동안 작가가 부단히 목격했을 장면이다. 색의 농도에 따라 섬세하게 변화하는 그림을 천천히 응시한 끝에서, 비로소 우리도 작가의 눈에 담겼던 그 빛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다.
〈붉은 시간〉(2022)은 단지 촛불이 빛을 내는 순간만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일출의 눈부신 빛과 일몰의 어스름한 노을빛, 그리고 그 빛의 잔상을 머금고 있는 지평선의 바다를 닮았다. 2014년 4월 이후, 바다는 여전히 먹먹하고, 일렁이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리고, 지금껏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브레히트(B. Brecht)는 급류하는 강의 폭력성에 대해서만 우리가 알고 있을 뿐, 그 강을 가두고 있는 둑의 폭력성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김지영이 지속해서 다루고 있는 것은 사회적 재난의 묘사가 아니다. 그것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세계의 폭력성이며, 개인의 생존과 직결되는 사회구조적 문제이다. 한국에서 촛불은 현실에 순응하지 않는 저항의 움직임, 그리고 추모와 애도의 상징이 되었다. 초의 몸이 다 타올라 눅진한 촛농으로 흘러내려 차갑게 굳을 때까지 김지영은 촛불의 변화를 관찰하고 또 빛을 감각하면서 매 순간의 장면을 묵묵히 기록했을 것이다. 소멸하기 직전의 촛불의 한시적 이미지는 작가의 손끝에서 그렇게 영속한다.
“바람이 불면 불꽃은 방해받지만 다시 일어선다. 어떤 상승력이 그것의 위신을 다시 회복시켜 준다. […] 불꽃은 생명이 살고 있는 수직성이다.²”
김지영은 초의 심지가 다 타오를 때까지 빛을 내는 시간을 개인에게 주어진 생애로 빗대어서 이야기했다. 불꽃이 높이 타오르는 생명력은 개인이 자신의 일상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강한 의지와 다름없을 것이다. 그는 캔버스 표면에서 대상이 혹여 지나치게 가볍거나 매끈하게 보일 수 있는 질감을 경계하며 붓을 든 손의 힘을 끊임없이 통제한다. 물감이 화면에 안착하는 매 순간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굳건한 믿음으로 대면한다. 촛불의 심지는 “용감하면서도 취약한 수직선”이다.
작가는 〈파랑 연작〉(2016–2018)을 완성했던 어느 봄날쯤에, 시간이 더 흐른 후 파란색이 아닌 다른 색으로 세월호를 그릴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2022년 가을의 문턱에서, 붉은색의 그림을 마주하고 서서 그때 그와 나누었던 대화의 온도를 떠올려본다. 가을 하늘이 유독 아름다운 까닭은 빛의 산란(散亂) 때문이라고 한다. 파란빛의 짧은 파장은 진동하는 횟수가 많기 때문에 대기층을 지날 때 빛이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가을의 차고 건조한 공기가 이 현상을 선명하게 보이게 만들어서 높고 푸른 하늘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산란하는 숨결⟫은 작은 불이 빛이 되고, 그 빛이 반사되며 흩어지는 순간처럼, 생동하는 모든 존재가 마땅히 숨을 쉬며 빛나야 할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진동하는 움직임이 더 많아질수록, 그것은 더 빛날 것이다.
¹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 김웅권 역, 東文選, 2008, 81쪽.
²Ibid.
Abstraction of “Robust but yet fragile verticality”¹
KIM Seonok
Drawing for Glowing Hour (2020–2022) are arranged on the three walls of P1 as a series, but not in the same measure. Not following a persistent order or rules, the story is told in a composition where the subject may or may not be clearly evident. Keem Jiyoung’s way of painting, which delivers the story in a ‘same but different’ way, (re)composes the image through a montage process of repetition and substitution, allowing us to sense the world that’s familiar to us again. Drawing for Glowing Hour (2020–2022) is more like a process through which the artist trains herself and experiments with distancing from her subject. She does not expose the form by intentionally removing the outline of the subject or, on the other hand, portray the form of the candle wick and the spreading light in an obvious way so as to control the speed in which the audience arrives at the subject.
The artist’s approach to the distance between herself and her subject made a radical turn since Glowing Hour (2020–2022). Keem’s preceding series of work, Look at This Unbearable Darkness (2019) was a figurative sculpture which rendered pairs of praying hands in candle wax. Choosing to work with oil paint starting with Glowing Hour (2020–2022), the artist’s work began to demonstrate gradual transformations to ‘abstraction’. However, Keem’s paintings aren’t completely abstract if abstract signifies forms that escape the concrete reproduction of real world. This is because Keem’s ‘abstract’ paintings, which at times do not seem to point at anything specific, always begin with the act of representing the subject. On the surface of the works that record the ever–changing candle flame, the wick and luminous source of the candle shows itself clearly at times while dimly at other times, by capturing different degrees of density and saturation. Now, it’s no longer meaningful to ask what Keem’s image signifies; rather, it’s more significant to closely examine what that image (was) is doing.
P1 brims over with the candle lights of different temperatures, while in P2, the flames climax, as if with the will to arrive at the highest point of heat. The three Glowing Hour (2022) paintings that greet the visitors as soon as they step in P2 near abstraction in terms of form, delaying the time of visual experience. The viewer must inevitably rest their gaze for a long time on the flat surface that’s evenly coated in red. It takes more time for color, in comparison to lines and planes, to be read as a form itself. The most intense and vivid part of light in the three paintings of Glowing Hour (2022) and the spreading of faint light in Glowing Hour (2022) located inside the space are scenes that the artist must have witnessed constantly while the candles burned. After slowly gazing at the painting that changes delicately according to the concentration of the colors, only then can we follow the movement of the light that was contained in the artist’s gaze.
Glowing Hour (2022) does not only remind the viewer of the radiating flame of the candle. It resembles the dazzling light of the sunrise, the dusky sunset, and the horizon of the sea that captures the afterimage of this light. Since April 2014, the sea is still the subject of a deafening, swaying fear. And, nothing has changed so far.
Bertolt Brecht said “The river that everything drags is known as violent, but nobody calls violent the margins that arrest him.” What Keem Jiyoung continuously explores in her work is not portrayals of social disasters; rather, it is the violence of the world which makes such disasters to inevitably happen, and social structural problems directly affecting the life of the individuals. In Korea, the candle light has become a symbol of resistance that does not conform to reality, and of remembrance and mourning. Keem would have silently recorded every single passing second, observing the changes in the candle and sensing the light until the body of the candle burned and soft and sticky wax dripping flowed down as it hardened cold. The temporary image of the candle on the verge of extinguishing lives on eternally at the ends of the artist’s fingertips.
“One puff can disturb the flame but the flame restores itself. An ascensional force restores its prestige. […] The flame is verticality of life.²”
Keem draws a metaphor between the lifetime given to an individual and the duration of a candle emitting light by burning itself up entirely. The vitality in the verticality of the burning flame is tantamount to an individual’s strong will to continue on their daily life. Keem constantly controls the power of her hands holding the brush, cautious of textures that can make the subject look overtly light or smooth on the surface of her canvas. She confronts every moment the paint settles on the surface carefully, but in firm faith. The wick of the candle is a “robust but yet fragile verticality”.
One spring day when Keem completed her Blue Series (2016–2018), she mentioned that later on in the future, she would portray Sewol ferry in a color that is not blue. I think back on the intensity of our conversation held as we looked at her red paintings together at the beginning of fall 2022. It’s said that the autumn sky is particularly beautiful because of the scattering in light. Blue light scatters in all directions as it passes through the atmospheric layer, because it has one of the shortest, highest–energy wavelengths. The cold dry air of the fall makes this phenomenon clear and results in clear blue sky. Scattering Breath reminds the viewer that just as a small flame becomes light that reflects and scatters, all things living deserve to breathe and glow. And they will glow brighter with more scattering movement.
¹Gaston Bachelard, La flamme d’une chandelle, Paris: Le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61, p.52.
²Ibid.
생존의 윤리
김정현
살아남는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윤리다. 불꽃의 가장 뜨거운 색 파랑으로, 하얀색 종이가 뜨겁게 타올라 파란색 불꽃의 일부가 될 것처럼 김지영은 『닫힌 창 너머의 바람』(2018)을 썼다. 1950년 6월 28일 〈한강인도교 폭파〉 사건부터 2015년 1월 10일 〈의정부아파트 화재〉까지, 오래된 신문 기사를 뒤져 한국 현대사에 기록된 서른두 건의 폭파, 붕괴, 화재, 침몰 등의 사건일지를 재편집한 책. 다리나 지하철 같은 공공 건축물이나 호텔, 아파트, 유람선 같은 대중 집합 시설에 관한 현대적인 표준 안전 시책이 수립되기 이전, 그리고 안전 기준이 마련된 이후에도 유사 고유명사로 안착한 ‘안전불감증’이 불러온 사고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이곳에서 일어난 대형 인재 참사의 목록을 훑으며 스트레이트 기사 풍의 건조한 문장으로 작성된 글을 읽다 보면,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의 기억이 근 과거의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원형과도 같은 도시형 재난의 역사적 계보 속에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이 사고들은 살인 사건보다 시각적으로 더 충격적인 이미지로 대중의 머릿속에 저장된다. 공공장소나 공공건축물을 매개로 한 사건 현장의 기록은 스펙터클한 수준이다. 그 기념비적인 재난의 이미지들은 물리적이고 정서적으로 압도적인 폭력의 힘을 등에 업고 당대의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긴다. 최초의 충격적인 경험 이후에 유사한 사건은 새로운 자극이 아니라 체험의 반복으로 인지된다. 사건들은 수용자의 마음 안에서 떨어져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최초의 충격, 일상을 무너트리고 그동안의 삶과 사회를 낯설게 보게 되는 순간의 경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후의 반복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주관이 수립되기 이전, 어린 시절에 맞닥트린 사건 사고 중에서도 분명 당시의 일상을 깨트릴 만큼 강력한 것이 있었을 텐데, 김지영이 세월호 사건을 일상과 창작에 있어서 특별한 계기로 맞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 너머에 체감한다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보와 지식의 양이 경험의 감각과 인지 능력을 초과하는 시절이 지나고 나면, 문득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으로 아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일들이 생긴다. 일상의 모든 것을 멈춰 세우고 말문을 틀어막는 고통스러운 체험을 대하는 태도는 제각각이다. 고통에 맞서는 것은 이미 고통에 마비된 사람에게는 더욱 더 두려운 일이기에 많은 사람은 침묵의 길을 택한다. 운을 떼는 사람 역시 매우 느리고 무겁게 시작할 것이다. 하나의 고통스러운 순간을 겨우 견디고 나서 다가오는 연속되는 고통의 경험들은 이제 그것의 면역력이 된 침묵과 함께 홀로 넘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오드리 로드(Audre LORDE, 1934–1992)가 말하듯이 우리의 침묵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언어와 그것의 의미를 중시하기보다 두려움을 더 중시하도록 사회화되어 왔지만,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사치스러운 최종적 순간만을 기다리며 침묵한다면, 그 침묵의 무게는 우리를 질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¹
그러므로 김지영은 온전히 떨쳐지지도 않을 두려움을 그러안고 다시 창작을 시작한다. 종이가 일어나고 찢어질 정도로 목탄을 짓이겨 그려낸 〈파도〉(2015)를 두고 “목탄이 [그림의 재료 중] 가장 가벼운데 이것으로 최대한 검어질 때까지 부딪혀서 만들어내야만 [다시 그림을 그리는 게] 조금이라도 가능해지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² “흑연의 응집력이 때 묻지 않은 종이에 의해서 점착력으로 부추겨진다. 종이는 스스로의 순결함의 잠에서 깨어, 하얀 악몽에서 깨어난다.”³ 이것은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가 어느 낭만주의 작가의 리얼리즘에 관하여 “(외부적 세계가 아니라) 물질이 존재한다.”고 설명하며 언급한 말이다.⁴ 작가에게 있어 리얼리즘이란 외부적 세계가 아니라 그가 다루는 물질에 존재한다는 말은 물론 전자의 전적인 부정이라기보다 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작가의 삶의 모습에 따라 전자와 후자의 경중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해질 때가 있다. 흑연의 자기 고립하는 응집력이 종이에 부딪혀 점착력으로 변화하고, 종이가 순결함과 하얀 악몽에서 깨어난다는 근사한 표현은 무자비한 현실의 은유로서도 강력한 힘을 지닌다. 김지영에게 있어 캔버스와 안료의 세계에 머무는 것과 생활 세계의 사건과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몸의 체감 정도에 있어 구분되지 않는다. 양자는 서로를 부추긴다.
생존은 더 이상 사유와 무관한 본능적이고 자동적인 ‘먹고사니즘’의 삶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한때 윤리적 화두는 일상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비상사태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사회학자 김홍중에 따르면 우리가 직면한 일상으로서의 인류세라는 “냉혹하고 초현실적인 생태–존재론적 위급상태의 이름”은 “생존주의를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정치적 자원으로 전환시킬 기회를 제공”한다.⁵ 이러한 존재론적 전환은 사건에 적당히 거리를 둘 수 있는 관찰자로서 “파상의 핵심(...) 환멸이나 실망을 통한 자아의 변형”(김홍중)을 통해 도달하게 되기도 하고,⁶ 사건에 휘말려 억압받고 상처받은 자가 “이미 그 고통을 모두 겪고 살아남았음을 되새기”(오드리 로드)며 일어나기도 한다.⁷ 어느 쪽이나 그러한 전환의 과정은 그 자체로 고통스러우며, 전환 이후의 삶 역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삶 그 자체가 분투이기에.
김지영의 작업하는 삶은 육체적으로 고되어 보인다. 약 한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하나의 화면을 구축하기 위해 집중하며 특정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매일 직장인들처럼 작업실에 출퇴근해서 시간을 보내며 겹겹이 화면을 쌓아간다. 화면이 평평해지지 않고 특정한 레이어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유화 물감을 빨리 마르게 하는 각종 미디엄을 사용하지 않는다. ‘붉은 시간’(2020–2021) 연작에서 화면은 대체로 크고 비율은 제각각이다. 80호 정사각형에는 초의 형태가 보이도록 하고, 좀 더 큰 화면에서는 위아래로 번지는 빛을 담았다. 큰 화면의 연작 회화는 작가의 체력을 소진해서 만들어진다. 그림 속의 대상은 언제나 촛불 한 자루. 작업실의 형광등 불빛 아래 조용히 심지가 타들어 가며 대기나 바람에 흔들리며 발광의 상태가 달라지는 촛불을 집요하게 바라본다. 촛불은 몽상의 매개가 되어 재난을 겪은 사람들에 관한 생각으로 이어준다. 불은 계속 흔들리며 변화하지만 언제나 뜨겁다. 한 대의 심지가 다 타들어 가는 시간 동안 밝혀지는 촛불에서 인간의 생명을 본다. 몽상의 과정에서 신체적 노동이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재난과 고통의 재현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끼어들 틈이 없다. 무엇을 그리든 그것이 형상적이거나 상징적으로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재현의 창작을 그의 몸이 버틸 수 있을지, 끝까지 버티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공허한 생존주의와 다른, 윤리로서의 생존은 우리 시대 작가들의 창작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다. 사회적 사건이든 개인적인 고난의 체험이든, 고통을 기억하는 작업은 신체를 소진시킨다. 그러한 소진은 촛불이 심지를 따라 타들어 가듯, 외부로 빛과 온기를 방출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다. 불빛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멀리까지 도달할까? 빛이 사그라지고 온기만 남은 때라도 그리 늦지는 않을 것이다. 기억은 현재가 아니라 오지 않을 것으로서의 미래를 향하는 것이므로.
*2021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비평 프로그램 –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¹오드리 로드,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바꾼다는 것」(1977), 『시스터 아웃사이더』, 주해연, 박미선 옮김(서울: 후마니타스, 2018), 53쪽.
²2021년 8월 19일 인천아트플랫폼에서 대화 중 김지영의 발언.
³가스통 바슐라르, 「물질과 손」, 『꿈꿀권리』, 이가림 옮김(파주: 열화당, 2007/1980), 78쪽.
⁴같은 책, 76쪽.
⁵김홍중, 『은둔기계』(파주: 문학동네, 2020), 231쪽, 234쪽.
⁶김홍중, 앞의 책, 77쪽.
⁷오드리 로드,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1983), 앞의 책, 331쪽.
The Ethics of Suffering and Survival
KIM Junghyun
Survival is the new ethic of our era. The hottest flames burn blue. As if ready to engulf the white pages of her book in such azure fire, KEEM Jiyoung wrote Wind Beyond the Closed Windows (2018). From the Hangang Bridge Bombing of 28 June 1950 to the Euijeongbu Apartments Fire of 10 January 2015, KEEM rummaged through old newspaper articles to compile 32 cases of demolition, collapse, fire, and sinking incidents recorded in modern Korean history. Many of these incidents took place before modern safety standards were established for public infrastructure such as bridges or the subway, or for venues of mass–gathering such as hotels, apartments, and cruise ships. Even after safety standards were put in place, neglect borne of complacency still led to accidents in more recent years. Reading KEEM’s dryly crafted, matter–of–fact account of these massive accidents caused by human factors over the past half–century in Korea provides a chilling reminder that an accident like the Sewol ferry disaster of 16 April 2014 is not a singular event of the recent past, but rather a part of the historic legacy of urban disasters, which is perhaps an unfortunate archetype of modern society.
Accidents like these become ingrained in the public’s mind as images more visually shocking than murder cases. Spectacles of accidents at public places or architecture are often akin to those of blockbuster disaster movies. Emboldened by the overwhelming sense of physical and sentimental violence, the images of such monumental disasters inflict the contemporaneous people with trauma. Once a person has experienced something so shocking, they recognize similar cases that follow as a repetition of the same experience instead of as new stimulus. As such, events like these remain interconnected in the spectators’ minds, instead of being remembered as isolated cases. The manner in which a person responds to such recurrence of disasters will depend on how the person responded to that initially shocking experience, which disrupted their daily life and forced a new, unfamiliar perspective of life and society. Such disruption of daily life by powerfully shocking events is not unique to disasters; even before they have fully formed their personality or thought process, children often come across something that changes how they see the world. What then, could have induced KEEM to select the sinking of MV Sewol as a special turning point in her daily life and artistic endeavors?
To “experience” something goes well beyond simply “knowing” or “understanding”. Once the volume of information and knowledge thrust upon us crosses a certain threshold of experience and perception, there comes a moment when we come to physically “experience” something we merely “knew” as individuals or society. Each person has their own way of coping with a painful experience powerful enough to stop everything in daily life and render us speechless. Many choose to remain silent as the notion of pain is particularly more dreadful to those who have already become numbed by pain. Those who do broach the subject would do so slowly and with due gravity. The series of painful experience that follows the initial moment of suffering become bearable with the immunity afforded by silence. But as the African American lesbian feminist Audre Lorde put it, silence does not protect us, “for we have been socialized to respect fear more than our own needs for language and definition, and while we wait in silence for that final luxury of fearlessness, the weight of that silence will choke us”.¹
Thus, KEEM embraces such unshakeable fear as she returns to her creative process. On Wave (2015), which KEEM created by rubbing the charcoal stick so hard that it actually tore into the paper, KEEM said “charcoal is the lightest [of all drawing materials], and I thought grinding it against the paper until everything was pitch black was the only way to get myself to [draw again]”.² As the French philosopher Gaston Bachelard said, “the cohesion of the graphite gets goaded into adhesion by the immaculate paper. The paper awakens from its own virgin dream and is roused from its nightmare of whiteness”.³ Bachelard gave the example of graphite and paper as part of his explanation on the realism in a certain romanticist artist’s work, saying that realism “exists in the material (instead of an external world)”.⁴ While this is likely intended to emphasize the importance of the material rather than to discredit the external world, debating the importance of one over the other may sometimes become meaningless depending on how the artist lives. The elaborate expression of the graphite’s self–isolating cohesion, changing into adhesion when applied on the paper that is itself roused from purity and white nightmare, is a powerful metaphor for the cruelty of reality. For KEEM, dwelling in the world of the canvases and paint does not feel any different from interacting with the events of the “real” world and the people around her. If anything, the two worlds goad each other on.
Survival is no longer simply a matter of mindless, automated cycle of eating and breathing irrelevant to reasoning. There was a time when ethical discourse was considered as something that takes place during emergencies, an extraordinary exception to daily life. However, according to sociologist KIM Hong Jung the “cruel and surreal eco–ontological crisis” known as Anthropocene “provides an opportunity to transform survivalism into a progressive and radical political resource”.⁵ Such ontological transformation can be reached by the moderately distant observer who undergoes “changes in self–identity from disillusionment or disappointment”(KIM Hong Jung)⁶, or by the oppressed and scarred who “remind [themselves] that [they] have lived through it already, and survived”(Lorde)⁷. Either way, the transformation is in and of itself a painful process. The life after the transformation is not one free of suffering either. Life itself is suffering, after all.
KEEM’s life of creativity appears physically taxing. She spends nearly a month on building a single work, focusing every fiber of her being to turn the empty paper or canvas into a certain state. Like any office worker,
KEEM commutes to her studio every day, constructing her surface layer by layer, hour after hour. In order to ensure her surface does not dry flat and maintains specific layers, KEEM does not resort to the tools often used to dry the oil paint quickly. In the Glowing Hour (2020–2021) series, her paintings are mostly large, but with varying proportions. The square painting measuring 112cm x 112cm is designed to present a clearer look at the candle’s shape, while bigger canvases capture the light bleeding out above and below. Such large works consume considerable amount of physical energy to create. Yet the subject in the works is always a single candle. KEEM must have spent hours staring at her candle’s wicker quietly burn through beneath the dim fluorescent lamp of her studio, relentlessly watching how the flicker of the flame changes the illumination with breeze. The candlelight becomes a catalyst for daydreaming, connecting her to the thoughts about the victims of disasters. The flame continues to flicker and change, but always remains hot. In the time it takes for a single candle to burn through, KEEM sees human life. Her daydreams and imaginations are always accompanied by physical labor. There is no time for musings like whether it is possible to represent disaster and suffering or not. It also does not matter that regardless of what she paint, it will end up representing something either figuratively or symbolically. What really matters is whether her body can withstand the toils of creative representation to the very end.
Unlike empty survivalism, survival as an ethic is the most important topic in the creative lives of contemporaneous artists today. Whether it is a social disaster or a personal suffering, the artistic endeavors to remember such agony takes a toll on the body. Such exhaustion is inevitable, just as the candle melts along with the burning wicker in order to emit light and warmth. How many people, and how far does such a light reach? Even when the flame is extinguished, leaving behind only the lingering warmth in the air, it will not be too late. After all, memories are all about heading towards the future that has yet to come, instead of dwelling in the present.
¹Audre LORDE, “The Transformation of Silence into Language and Action”(1977), Sister Outsider, trans. Hae Yeon CHOO and Mi Sun PARK (Seoul: Humanitas, 2018), p.53.
²Remarks by KEEM Jiyoung during a conversation at Incheon Art Platform, August 19, 2021.
³Gaston BACHELARD, “Hand vs. matter”, The Right to Dream, trans. Lee Garim (Paju: Youlhwadang, 2007/1980), p.78.
⁴Ibid., p.76.
⁵KIM Hong Jung, Reclusive Machine (Seoul: Munhakdongne, 2020), p.231, p.234.
⁶Ibid., p.77.
⁷LORDE, “Eye to Eye” (1983), Op.cit., p.331.
김지영 작가론 – 세월에 기대어
목정원
세월이 흐른다는 말을 쉬이 뱉을 수 없던 세월이 있었다. 그럼에도 어느덧 세월이 흘러, 흘러 우리는 여기에 왔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잊지 않겠노라 말하면서. 그러나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은 이상하지 않은가. 잊음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일이나 제 의지를 발현하여 과히 역행해보겠다는 시혜적인 태도를 담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그 사건은 애초에 결단코 잊히지 않는 종류의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도저한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월은 세월이 되어 우리 곁에 스며 있지 않던가.
그럼에도 물론 망각의 기운은 도처에 팽배하다. 어떤 사건들의 잊히지 않음은 그것의 체험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진정 겪었더라면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각자가 처한 곳에서 각자의 몸으로 슬픔을 통과했더라면. 반면 그 사건이 한 번도 자신의 고통이 된 적 없는 이들에게 망각과 외면이 도래함은 자명한 일이다. 그들에게 세계의 고통은 없었던 일과 같다. 그들은 고통을 모른 채 계속 살아갈 수 있다. 허다한 여타의 사건들에 대해, 한때 우리는 모두 저 무감한 얼굴을 잔혹하게 휘두른 적이 있다.
그렇지만 어떤 이들에게 세월은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이 되었다. 다시는 무감해질 수 없는,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상흔이 남은 것이다. 살다보면 언제고, 미처 말이 되지 못했던 세계의 비명을 듣게 되는 날이 오게 마련이던가. 우리가 듣지 못하던 동안에도 세계를 채우고 있던 그 모든 탄식과 애환. 그것을 맞닥뜨리게 되는 일. 아직 나의 배는 안전해 보일지라도, 도처에서 일어난 전복들로 거칠어진 파도가 턱밑까지 당도하는 일. 그것이 나를 뒤흔들고 그 어떤 안전한 정박도 보장되지 않는 표류의 삶으로 밀어내는 일.
그 일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선택을 한다. 이는 잊겠다거나 잊지 않겠다거나 하는 종류의 선택이 아니다. 당면한 표류, 난폭한 너울짐 가운데, 망각의 가능성은 그들 의지의 바깥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잊힐 수 없는 세계의 광막한 고통 앞에 다만 무력해진다. 그리고 가장 무력한 자리에서 나약한 손을 들어 선택을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굴복할 것인지, 맞설 것인지. 김지영의 작업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세월이 침몰했을 때 그는 부끄럽고 두려웠다. 누구라도 탈 수 있는 배였다. 아주 커다란 배였다. 구한 줄 알았고, 그 후로도 구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그 시간 동안 아무도 구하지 않는 것을 모두가 지켜보았다. 가라앉는 죽음은 나의 일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타인의 것으로 두고 싶은 마음이 작동했는지 모른다. 광장에는 혐오의 말이 넘쳐났다. 무력감과 죄책감에 휩싸였다. 한참 후 마침내 팽목을 찾았을 때도 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마주할 수 없는 공포 앞에서 풍경 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그곳에 당도했음을 알려주는, 보이지 않는 바람의 소리를.
이것이 사람으로서 느낀 무력감이었다면, 작가로서의 무력감은 더욱 어둡고 질긴 것이었다. 저 끔찍한 사건을 예술이 다루어도 괜찮은가. 수장된 몸들의 고통을 사용할 권리가 작가에게 있는가. 왜곡 없는 재현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면, 예술이 죽음을 왜곡해도 괜찮은가. 저 숱한 질문들 앞에 흠결 없이 서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법만이 남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전할 수 있다. 예술의 월권으로부터, 반드시 발생할 잘못들로부터.
팽목의 항구 앞에서 차마 눈을 못 뜨고 서 있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 김지영의 눈 앞에는 그저 바다가 있었다. 그것은 그저 바다일 뿐이었다. 그 사실이 그에게 또 다른 허망을 주었다. 그러나 때로 허망은 왜인지 새로운 힘 쪽으로 우리를 손짓하기도 하지 않던가. 가없는 바다, 너울지는 파도는 그대로인데, 거기서 누군가는 죽어야 했던 것을, 그 비참의 근원을 그는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가로서의 도구가 작업 뿐이라면, 기꺼이 자신의 작업을 통해.
할 수 있어서 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다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것이었다. 안다고 공언하는 것도, 모르니까 손을 놓는 것도 도무지 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피차 모든 진실 가까이에는 모순이 놓여 있는 법이므로. 그는 모순을 껴안기로 했다. 이는 부끄러움을 짊어지는 일이며, 언제고 발목을 잡는 자신의 한계를 영원히 인정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2015년 봄, 세월을 다룬 첫 작업에 김지영은 ‘선할 수 없는 노래’라는 이름을 붙인다.
세계의 고통 앞에 울음으로 불러야 하는 노래가 결코 선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침묵해야 하는가. 그러나 선하기 위해 침묵하는 동안 온갖 혐오가 켜켜이 쌓여 진실을 가로막는 일을 어찌할까. 나의 선함은 세계의 아픔보다 귀한가. 그렇지 않다면, 끝내 선할 수 없음을 무릅쓰고 아픔을 노래하면 어떤가. 선할 수 없는 노래라도,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 노래는 감히, 재현 불가능한 것을 주제로 삼는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재현불가능한 것을 재현할 수는 없다. 우리는 세월의 실재를 알지 못하며, 수장된 고통의 가없는 감각을 결코 납득 가능한 무언가로 환원시킬 수 없다. 세월은 거기 그렇게, 여하한 재현을 끝없이 비껴가는 참혹으로 남아 있을 뿐.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여전히 재현해야만 하는 작가는.
이 지점에서 김지영은 지난한 확장과 우회의 길을 가기로 한다. 세월을 직접 겨냥하지 않는, 세월을 우회하는 또 다른 재현들을 펼쳐놓는 것. 예컨대 잠, 또는 호흡 같은 것들을 주제 삼는 것. 주제마다 필요한 매체를 바꿔가며 어떤 때는 한 겹 한 겹 파도처럼 아크릴을 바르고, 어떤 때는 초를 녹여 깎아 기도하는 손을 조각하는 것. 그로써 말할 수 없는 세월의 참혹이, 그 재현불가능한 고통의 실재가 자신의 작업 너머에서 한 순간 스스로 얼굴을 드러내기를 비는 것.
이는 자신이 건드릴 수 없는 저 실재에 대해 예의를 지키는 일이며, 세계의 고통 앞에서 작은 사람으로 남는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세월 이후 그가 뼈아프게 알게 된 바, 세계는 무수한 세월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김지영은 세월을 우회하다가, 모든 잠이 죽음인 것을, 모든 호흡이 마지막인 것을, 모든 참사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목도의 시간이 그를 무너지게, 또 일어나게 했고, 세월에 관한 그의 작업을 세계의 모든 모순과 아픔에 대한 작업으로 확장시켰다. 달리 말해 앞으로 그가 어떤 작업을 하게 되더라도, 그는 세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팽목에서 돌아와 처음 그는 〈파도〉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린다. 다짐했지만 무섭고 선택했지만 복잡한, 그 즈음의 마음을 목탄으로 짖이겨 쌓은 작품이다. 차마 고개 들지 못하고 막막히 선 채 파도 소리, 풍경 소리를 듣던 그날의 감각. 그때, 아직 눈으로 보지 못했던 바다. 그 바다를 그림으로 구현하는 일의 모순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시각을 초월했던 아득한 물성들을 다시 한번 몸을 부딪혀 시각화한다. 손의 감각으로 파도의 감각을 구현하고, 움직임의 축적으로 까만 화면에 얼룩진 상처를 긋는다. 곧이어 펼쳐질 기나긴 목도의 시간에 앞서, 그렇게 먼저 자신의 공포를 목도한다.
이후 〈파도〉는 첫 번째 개인전 ⟪기울어진 땅 평평한 바람⟫(2015.11.19–12.10, 오뉴월 이주헌)에서 다른 네 작품과 더불어 전시된다.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설치 작업 〈바닥〉은 세월이 잠긴 이래 발 딛은 모든 지면이 기울어진 듯한 일상의 감각을 움푹한 비탈로 형상화했고, 〈오늘의 성장〉은 그 중 가장 가파른 비탈 아래 마른 화분들을 무너져 쌓이게 했다. 그리고 〈바람〉은 침몰 이후 1년 동안 팽목에 불어왔던 매일의 바람의 비피엠을 북소리로 치환해낸다. 그 박동, 기울기, 메마름의 감각들이 모여,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말을 대신해 관객의 몸을 건드린다.
특별히 〈바람〉의 경우, 이후 ⟪젊은모색 2019: 액체 유리 바다⟫(2019.6.20–9.15,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보다 공감각적인 방식으로 변형, 설치되기도 했는데, 거기서는 북소리가 천장을 둘러싼 12개의 스피커에서 순차적으로 흘러나와 12달의 흐름을 형상화했고, 음향의 조절을 통해 멀어지고 다가가는 소리들이 관객의 움직임에 공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세 개인전의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 김지영에게 있어 바람과 숨이라는 주제가 주요하다는 점인데, 아마도 이는 그것이 언제 어디서 우리를 스쳐갔을지 모를, 어떻게 당신에게로 옮아갔을지 모를, 보이지 않게 모두를 연결하는 흐름을 지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바람이, 숨이 끊어지면 사람은 죽는다. 그 사실을 부인할 자는 없다. 세월의 고통에 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가까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선연할 것이다. 그리하여 김지영은 첫 개인전의 마지막 작품 〈수면〉에서 인간에게 보편적인 죽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또 한 번의 우회를 거쳐 잠 자는 얼굴들을 그려낸다. 물을 잔뜩 섞은 아크릴로 투명하게 한 겹씩, 사람을 어루만지는 느낌으로 붓질하고, 물결이 겹쳐 바다가 되듯 축적된 레이어로 인해 물먹은 종이가 우는 질감을 그대로 살려냈다. 그리하여 수면에 빠진 얼굴들은 수면을 부유하는 죽은 얼굴로, 관객의 눈 앞에 치환되어 일렁인다.
이처럼 보편적인 주제로 회유하며 감각의 증언에 몰두했던 첫 번째 개인전을 지나, 두 번째 개인전 ⟪닫힌 창 너머의 바람⟫(2018.6.1–7.1, 산수문화)에서 작가는 세월이라는 사건의 현실적 이면과 실제적 반향으로 눈을 돌린다. 그는 1950년대 이래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수많은 참사를 연구하고, 이를 〈닫힌 창 너머의 바람〉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사건마다 수십편의 기사를 참고하여, 감정적 사연이나 언론의 오류를 배제한 객관적 구조만을 최대한 정리했고, 그 구조의 어김없는 반복을 확인하며 분노했다.
허락된 정원을 증원하고, 이미 보고된 위험을 외면하고, 안전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을 고용치 않는 것. 이에 더해지는 초기 대응의 미숙함과 허술한 시스템, 모두의 책임 회피. 그 모든 추악의 결합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그 죽음에 합당한 경외가, 그 살인에 합당한 처벌이 매번 얼마나 부재했는지. 그리하여 얼마나 오래 똑같은 모양의 사건들이 되풀이되어 세계를 흔들었는지. 그 비명을 우리가 얼마나 오래 듣지 못했는지. 혹 지금도 듣지 못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죽어야 할지.
책에서 다루어진 32개의 사건은 〈파랑 연작〉 속 32점의 정방형 오일파스텔화가 되어 공간 곳곳에 배치되었다. 3년 동안 지속된 작업 속에서, 들여다보면 비명이 들리는 것만 같던 낡은 사진들을 재현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본디 파랑이라는 색은 가장 뜨거운 온도를 지시하면서도 차가움의 정조를 간직하는 것. 그 색에 기대어, 작가는 감정적 뜨거움에 치우치지 않도록, 그리는 손이 몰입의 쾌감에 젖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거리두기를 체화했고, 파랑 속에 있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활용함으로써, 각각의 재현으로부터 현실성의 더께를 덜어냈다.
그리하여 각 그림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을 지시하기보다,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현재적 풍경을 암시한다. 실제로 작가는 작품 캡션에서 연도를 삭제하고 날짜만을 제시함으로써 이 같은 효과를 증폭시켰고, 그 날의 일기예보를 책 속에 함께 기록하여, 흐린 후 점차 맑아지는, 한때 눈이 오는, 대체로 맑고 곳에 따라 소나기가 내릴, 여느 날 중의 하루에 불과하던 모든 비극의 현재성을 담담하게 경고했다. 이때 책에서도, 그림 연작에서도 세월은 다루어지지 않는데, 이 교묘한 구멍은 도리어 다른 모든 재현 너머에서 강렬하게 세월을 호명해낸다.
한편, 우리가 세월에 대해 그러했듯, 사건이 반복될 때마다 개인의 삶 속에서 고통을 마주해온 역사가 있었을 터. 과연 실제로 그러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두 번째 개인전이었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나의 고통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뼈아프게 확인하는 일. 역사 속에 지워진 수많은 고통의 물성을 다시 하나씩 셈해보는 일. 이때 김지영의 특별한 점은, 저 고통받는 개인의 범주를 직접 고통을 당하는 자 뿐 아니라 고통을 응시하는 자에게까지 확장시킨다는 점이다. 그의 시선은 수장된 죽음 뿐 아니라 남은 우리의 생을 함께 보듬는다.
그래서일까. 세 번째 개인전 ⟪빛과 숨의 온도⟫(2020.12.28–2021.2.10, WESS)는 한결 따스한 감각으로 관객을 감싼다. 관객은 초의 다양한 열감 안으로 들어서, 노랑과 붉음의 스펙트럼 속에 가만히 머무는가 하면, 하염없이 도래하는 저물녘의 바다와 거기 얹히는 숨소리를 제 호흡으로 잠잠히 통과한다. 이처럼 김지영의 손길이 따뜻해진 것은 물론 세계의 고통이 누그러져서가 아니다. 도리어 세계의 고통을 더 많이 알게 되어서이다. 목도의 시간을 통과한 그는 더욱 깊어진 눈으로 빛의 너울거림을 바라본다.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된다. 세월에 기대어서.
전시는 〈붉은 시간〉이라는 제목의 유화 연작, 그리고 전시와 같은 제목의 영상 〈빛과 숨의 온도〉로 이루어진다. 전자는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반면, 후자는 어느 곳에서나 감상이 가능하다. 관객은 핸드폰 화면 등 각종 모니터를 통해 영상에 접속하고, 각자의 장소에서 자신만의 작은 바다를 만난다. 영상의 처음과 끝에 자리한 반짝이는 수면은 팽목의 것이다. 소리가 삭제된 고요 속에서, 오늘의 바다는 다만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럼에도, 그렇기에 더욱, 우리는 저 수면 아래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 잊지 못한다.
인천, 어은돌, 대천, 새만금, 구시포, 목포신안, 진도팽목항. 작가는 서쪽 해안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차마 바다로 가지 못한 채 뭍에 남아서, 사라진 숨들과 시선을 맞춘다. 화면은 각 해안의 낮고 기다란 수평선과 물들어가는 하늘을 정지된 프레임으로 담는다. 그 안온한 풍경 속에 옅은 숨소리가 깔린다. 그리고 사이사이 짧고 희미하게 팽목의 거친 파도가 오버랩된다. 그러다 마지막 해안에 닿기 직전, 한 순간 그 엉킨 파도가 화면을 장악하고 소란한 풍경 소리가 굿판의 종소리처럼 마음을 뒤흔든다. 그리고 다시 숨소리만 남았다가, 이내 완전한 고요가 온다.
그 날 이후 우리는 바다를 바라볼 때 세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세월 생각만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영상을 보는 4분 30초 동안은 세월 생각만 할 수 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안도감을 줄 것이다. 세상의 어떤 서쪽 바다에도 세월이 있다. 기울어지는 하늘 빛 너머 잠깐씩 들이치는 파도가 애달픈 것은 그것이 우리네 삶 속에 돌연히 스미는 비극을 닮은 탓도 있겠지만, 파도 아래 숨은 얼굴들의 교신 같은 탓도 있을 것이다. 살아있으라, 살아있으라는 그들의 신호.
특별히 이어폰으로 들을 것이 권장되는 저 영상 속 숨소리는 얼핏 죽은 자의 호흡 같지만 이는 사실일 수 없다. 죽은 자는 숨을 쉬지 않고 그것을 아는 우리는 저 숨소리를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의 살아있음을 체감한다. 사람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새삼스런 사실을 인식한다. 이는 마치 한낮의 환함 속에서도 해는 이동하고 빛은 이지러진다는 사실을 붉은 석양 앞에서야 비로소 감각하게 됨과 유사하다. 〈빛과 숨의 온도〉는 바로 그 인식을 돕는다. 저 바다로 날마다 해가 건너가고 있으며, 그 빛의 안온 속에 우리는 살아있다고 전한다.
그리고 관객은 그 영상을 잠들기 전 이불 속에서나 귀갓길의 버스 안에서 본다. 커다란 바다, 먼 하늘 빛이 각자의 내밀한 장소로 몸을 낮춰 들어온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들숨으로 채워지던, 그러다 팽목에 다다르는 순간 날숨으로 다시 변하던 저 숨소리가 저마다의 호흡과 연동된다. 이처럼 관객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는 방식은 〈붉은 시간〉에서도 드러나는데, 영상이 커다란 것의 축소를 통해 만남을 도모한 것과 반대로, 그림은 작은 것을 확대시켜 관객과 만나게 한다. 작은, 촛불이 가없는 빛으로 우리를 감싸 안는다.
9점의 커다란 유화 작품이 전시장의 작은 공간을 둘러싸고, 환하게 퍼지는, 석양을 닮은 빛의 온도 속으로 관객이 들어선다. 각 그림은 타고 있는 초의 불빛을 커다랗게 확대한 일부로, 노랑과 붉음 사이, 이따금 푸름도 잿빛도 끼어드는 깊은 스펙트럼이 제시된다. 어떤 그림 속에서는 선연한 붓질이 둥근 불의 막을 보여주고, 어떤 열감은 형태도 붓질도 없이 화면에 퍼져있다. 이 모든 아득함은 작은 초에서 나온 것이다. 무언가를 밝히고 비추는 일은 다만 거기서 시작된다. 초는 하나 하나의 삶이며, 한 생이 사라질 때까지 빛은 너울짐을 멈추지 않는다. 영상 속의 숨이 관객의 호흡이 되듯, 그림 속의 빛 역시 그의 생의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때 관객이란 누구인가. 그는 우선 문자 그대로 보는 사람, 곧 목격자이자 증인이다. 그리고 김지영의 작업에서 목격은 다만 멀찍이서 발생하는 일이 아닌, 일종의 연대에 가까운 행위였다. 일례로 〈수면〉 작업 당시 그는 자신의 지인, 또는 지인의 지인을 그렸는데, 그러기 위해 그들의 자는 모습을 먼저 사진으로 촬영하되, 가족끼리 서로가 서로를 직접 찍도록 했다. 사랑하는 이의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 그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 이를 통과함으로써 그들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서로의 순간에 대한 증인이, 가장 가까운 죽음에 대한 연대자가 됐다.
그런데 또 한편 관객은 무엇보다 스스로 겪어내는 자, 살아가는 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거 세월의 침몰을 보았고, 지금 여기에서 날마다 여전히 현재적인 아픔을 통과하고 있다. 세월은 흘러가버린 역사가 아닌 우리를 에워싼 문화가 되었다. 그 축적된 죽음의 문화 속에서, 오늘의 관객은 언제고 내일의 희생자가 될 자신의 자리를 기억한다. 혹은 어쩌면 그때도 부끄럽게 살아남은 목격자가 될. 다시 또 모든 것을 영영 잊을 수 없을. 그들을, 빛과 숨의 온도가 끌어안는다.
이 글의 초입에서 나는 결코 잊히지 않는, 잊힐 수 없는 사건의 강렬함에 대해 단언하듯 썼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그리 호락호락하지도, 간단하지도 않은 문제다. 살아가는 일은 끈질긴 것이므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고 난 후, 조금도 지워지지 않고 날마다 생생히 되살아나는 그 죽음의 감각에 시달리다가, 이대로는 살 수 없다 느껴졌을 때 나는 그만 잊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자 그 감각이 거짓말처럼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이는 김지영의 두 번째 개인전 속 또 다른 설치작 〈기억의 자세〉를 떠올리게 한다. 천장에 달린 니트에서 길게 빠져나온 실 하나가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한 올 한 올 풀려나가 실타래에 다시 감기는 작품. 요컨대 그 털실처럼 시간 속에 풀어져가는 것들이, 때로 분명히 생의 지속을 돕는다. 그러나 모든 풀려감은 또 다른 쌓임을 만들며, 완전한 망각이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하면서도 살지 못하지만, 기어이 잊고서도 살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김지영이 그랬듯, 세월에 기댄 채로 살아갈 뿐.
조르쥬 디디–위베르만은 아우슈비츠의 재현을 연구하며 생존과 후생의 개념을 구분한다.¹ 생존이란 당면한 사건으로부터의 살아남음을 뜻하며, 거기서는 망각이 유용한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생존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하고, 아득한 후생의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그렇다면 살아남음 이후를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아마도 생존을 위해 덮어두었던 것들을 다시금 열어 목도하며. 끝없이 기억하고 증언하며.
그런 의미에서 김지영은 후생의 예술을 하는 작가다. 그의 작업은 세월이 침몰할 때 함께 가라앉은 우리의 한 생애와, 그 너머의 또 다른 생애를 돕는다. 그리고 후생을 돕는 힘은, 언젠가 반드시 우리의 생존 역시 도울 것이다. 바람처럼, 숨처럼.
¹Georges Didi–Huberman, Essayer voir, Paris, Editions de Minuit, 2014.
Essay on Keem Jiyoung
– Leaning on time¹
Mok, Jungweon
At one point, one couldn't just say “time passes”. Despite so, time surely did pass, and we’re where we are today, saying “Lest we forget” every April. But isn’t the phrase ‘lest we foret’ strange? It connotes a rather charitable attitude of using one’s will to try to forcefully counter a natural process of ‘forgetting’. But that incident was not the kind of incident that could ever be forgotten from the first place. And for that reason, irrelevant to the will of good people, Sewol became time itself, infiltrating us.
Nevertheless, the energy of oblivion prevails everywhere, because the impossibility of an incident to be forgotten is preceded by the experience of such incidents. In short, people cannot forget something if they truly went through it, if people had gone through the sorrow in each individual’s own body in their own place. On the other hand, it’s self–explanatory that those to whom this incident was never a sadness of their own, they would be oblivious to and ignorant of it. For them, the suffering of the world never happened. They can go on living, not knowing about pain. On a number of other incidents, we have all cruelly shown those heartless faces.
But for some, Sewol has become an irrevocable point of inflection. They have been left with a scar that can never be forgotten even if they so desired, one that will never leave them indifferent. In life, there’s bound to be a time when one gets to hear the screams of the world that cannot become words, all the sighs and sorrows that filled the world even when we weren’t listening. One might come to face them, finding their boat, which seems safe just yet, surrounded by all the capsized boats causing rough waves just beneath. One might find that suddenly, all this shakes them up, and takes them out to a life adrift, promising no anchors of any kind.
When one finds themselves in such situation, they make a choice. This choice is not the kind that demands whether one forgets of doesn’t forget. In the life of a castaway in the rough waves, the possibility of forgetting lies outside of their will. They only become powerless in front of the immense sufferings of the world that can never be forgotten. In the most helpless position, they raise their hands and make a choice, whether to surrender to the inability to do anything, or to face it. And this is precisely the point where Keem Jiyoung’s work takes off.
When Sewol sank, Keem was ashamed and frightened. It was an ordinary ferry. A huge ferry. She thought everyone was safe, and even afterward, there was still a lot of time to save them. But everyone watched on, as they weren’t saved. It was their fate to drown to death. Perhaps this is what made people to leave all this as the case of the other even more. Words of hatred filled the square. Helplessness and guilt took over. When Keem went to Paengmok Port, much later, she couldn’t lift her head due to shame. She could just merely listen to the sound of the wind–bell, standing in front of a fear she couldn’t face. It was the sound that let her know that she had arrived: the invisible sound of the wind.
If this was a sense of helplessness Keem felt as a human being, helplessness she felt as an artist was a much darker and substantial one. Would it be okay to deal with such a devastating incident through art? Does the artist have the right to use the pain of those who were buried in water? Is representation without distortion possible, and if it is, is it okay for art to distort death? To stand flawlessly in front of the countless questions, there wouldn’t be anything one can do except just do nothing. Doing nothing guarantees one’s wellbeing and safety, from the arrogation of art, and from things that will definitely go wrong.
Perhaps that’s why Keem stood at Paengmok Port, unable to keep her eyes open. But when she raised her head, what Keem saw was just the sea. And this filled her heart again with a sense of emptiness. But at times, even emptiness beckons us to a path to new strength for some reason. It remains a boundless sea and surging waves. She realized that she had to look closely into the root of the tragedy, where someone had to die in that sea. And if art was a tool for the artist, then willingly through art it shall be.
It wasn’t something Keem decided to do just because she could do it. She did it despite the fact that she didn’t know it all. It didn’t seem appropriate for her to profess to know, or to do nothing because she didn’t know. She decided to embrace contradictions because contradictions lie near every truth anyway. This was to bear shame and to admit the limitations of being held back at any time forever. So, in the spring of 2015, Keem named the first work dealing with Sewol disaster, song unable to be good.
If the song to be cried in front of the world’s suffering can never be good, then must we remain silent? But what must we do about all sorts of hatred piling up and hindering the truth being told while we stay silent in order to be good? Is my ‘goodness’ more valuable than the suffering of the world? If not, then why not face the fact that I can never be good and just sing about the pain? Shouldn’t one still sing, even though it’s a song that cannot be good?
Here, the song focuses on a subject that is not representable. But something that is not representable literally cannot be represented. We don’t know the truth behind the Sewol disaster, and cannot reduce the endless sensation of suffering buried in water into something that’s acceptable. Sewol just remains there as a wretched tragedy that ended up avoiding representation of any sorts. Then what can be done by the artist, the artist who despite of it all, must continue representing something?
At this point, Keem decided to take the path of infinite expansion and detour. A path that doesn’t directly point at Sewol, but one that detours it to unfold other representations of subjects such as sleep or breath, changing the medium as necessary according to the subject, at times applying acrylic paint layer by layer like waves, while at other times carving candle wax to make praying hands. And begins hoping that, by doing so, the silence of Sewol, and its ineffable pain, starts to reveal itself beyond her work.
It’s about keeping her manners about what lies off limits for her, and remaining humble in front of the world’s suffering. Keem had no choice but to do so, because what Keem realized after the Sewol incident, is that the world is filled with incidents similar to this. Making circles around the Sewol incident, Keem realized that all sleep equates death, that all breath is the last, and that all disasters have on the same face. The time of witnessing made Keem collapse and stand up again, and she expanded her works about the Sewol incident to works about all the contradictions and suffering in the world. In other words, no matter what works Keem produces, she will always be talking about Sewol.
Upon returning from Paengmok, Keem first produced a painting called Wave, which portrays through smudged charcoal the artist’s determined yet frightened, unyielding yet complex state of mind at the time. It depicts how she felt that day, listening to the sounds of the waves and the wind chimes, unable to lift her head in heaviness. It was the sea that wasn’t able to see with her eyes yet. In the contradictory situation of having to depict that sea in her work, the artist struggles with her whole body, to visualize the vague physical properties that transcended her sight. She rendered the feel of the waves with the sense of her hands, then stroke the stained wounds on the image, black with the accumulation of movements. Keem witnesses her own fears first, before the long period of witnessing that will soon take place ahead of her.
Soon after, Wave is exhibited along with four other works in Keem’s first solo exhibition Tilted Land Even Wind(Nov 19 – Dec 10, 2015, O’NewWall E’Juheon). In the installation work Ground which composes the entire exhibition, the steep incline symbolized the everyday feeling as if the entire surface of the earth under one’s feet is slanted ever since the Sewol incident. And in the work Today’s Growth, dried up plants are fallen and piled up at the bottom of the steepest incline in the exhibition. The work Wind converted the BPM of the wind in Paengmok Port every day of the 1st year after the incident into drum sounds. The beats, the slant, and the dryness all came together, embracing the spectator’s senses about things that are unutterable.
In particular, Wind was transformed and installed in a more synesthetic way in Young Korean Artists 2019: Liquid Glass Sea(Jun 20 – Sept 15, 2019,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Gwacheon). In the exhibition, sound of drums from 12 speakers surrounding the ceiling were heard in order, symbolizing 12 cycles of months. By controlling the volume, the sound fading in and out resonated with the movement of the spectator. What’s interesting is that wind and breath are important subjects to Keem as illustrated in the titles of her 3 solo exhibitions. This is probably because wind and breath direct at a sense of flow that connects us all invisibly, unknowingly passing us by somewhere and sometime.
One dies when that wind or breath stops. It’s a fact that no one can deny. Even for someone who can’t empathize with the pains of Sewol, fear of death that lies near is apparent. Thus, in the last work of her first solo exhibition, Keem talks about the universal human condition of death in a roundabout way, by portraying the faces of people sleeping. Layer after layer in thin watered–down acrylic, Keem takes her strokes as if to caress their faces. With layers that accumulate as if to portray the sea, she captures the texture of water–drenched wrinkled paper, and the faces in deep sleep swaying in front of the spectator like dead faces adrift in deep waters.
Following the first solo exhibition which circled around universal subjects and remained devoted to the sensorial testimonies, Keem’s second solo exhibition Wind Beyond the Closed Windows(June 1 – July 1, 2018, Sansumunhwa) explored the realistic side of the Sewol Incident and its actual reverberations. Keem researched the countless disasters that occurred in Korea since 1950s, and published this in a book called Wind Beyond the Closed Windows. Keem referred to dozens of articles per incident, and organized an objective structure which eliminated emotional narratives or errors of the press as much as possible. And the artist was infuriated when she saw the clear repetition of such structure.
They went over the allowed quota, turned a blind eye to the already reported risks and did not hire the minimum number of people needed for safety. How many people have been killed by the combination of such repulsiveness? How insufficient have the suitable punishment for the deaths and murders been? How long have the same incidents shaken the world over and over again? How long have we not heard the scream? And if we still don’t hear it now, how many more people must die before we hear it?
The 32 incidents introduced in the book were rendered into 32 squares of oil pastel works in the Blue Series, displayed throughout the space. In three years of working on the project, it was painful to recreate the old photographs that seemed to scream whenever one looked at them. But the color of blue originally indicates the highest temperature as well as the peak of coldness. Relying on the color, so as not to become too emotionally heated, the artist kept a constant distance from the work so that she doesn’t lose herself in the pleasure of becoming absorbed in her drawing. By using the colorful spectrum in blue, Keem removed an extra layer of reality from each representation.
Therefore, each painting implies a present landscape that’s occurring simultaneously, rather than directing at specific historical events. In fact, the artist maximized this effect by deleting the year from the caption and presenting only the date. She also recorded in the book the weather forecast for the day, such as “gradually clearing after fog”, “occasional snow” and “mainly sunny with rainfall in some regions”, calmly giving a warning of the present aspect of all tragedies that could just happen any day. Sewol wasn’t dealt with in neither the book nor the series, but this tactful omission actually ended up powerfully reviving the ferry disaster beyond all other representations.
Meanwhile, there must have been a history of facing suffering and pain in individual’s life every time an incident repeated, as there was with Sewol Incident. Keem said that her second exhibition was about questioning this history. It was about painfully finding out that an individual’s suffering is not only their own. It calculated each of the properties of countless sufferings that have been erased in history. What’s special about Keem is that she expands the sphere of the individual in suffering to not only the victim of the suffering but also to the one who looks at such suffering. Her gaze embraces not only the death of those buried in water, but also those who remain and live on.
Perhaps that’s why, but Keem’s third exhibition Glow Breath Warmth (Dec 28, 2020 – Feb 10, 2021, WESS) embraces the spectator with a much warmer sensibility. The spectator enters the various degrees of heat of the candle, quietly stays in the spectrum of yellow and red for a while, and calmly breathes through the endless sea in the sunset and its sound of respiration. It’s not because the pain of the world has been lifted that Keem’s sensibility has softened up; on the contrary, it’s because Keem got to know more about it. Having passed through a time of witnessing, the artist looks on at the swelling of light with a deeper gaze. She becomes a person who stands next to it, leaning on time (Sewol).
An oil painting series titled Glowing Hour is on view in the exhibition, as well as the video work of the same title of the exhibition, Glow Breath Warmth. While the oil paintings are displayed in the exhibition space, the video work can be experienced anywhere through any monitor including smartphones, allowing the viewer to access a small sea in their own given space. The sparkling surface of water, from the beginning of the video to the end, is taken from Paengmok Port. In the silence, removed any sound, the sea today is blindingly beautiful. And despite so, or perhaps even more because so, we can never forget what we have lost underneath the surface of that water.
From Incheon to Eoeundol, Daecheon, Saemangeum, Gusipo, Sinan in Mokpo, and Paengmok Port in Jindo, the artist traced down the Western coast of Korea, remaining on shore and unable to head out to the sea, with her gaze fixed on the vanished breaths. The video is of fixed shots of long and low horizon of each shoreline and the sky of changing colors. Low sounds of breathing can be heard in the tranquil scene, which is superimposed with intermittent short and faint scenes of the rough waves of Paengmok Port. And just before reaching the last shoreline, waves seize the screen and chaotic sounds shake up the viewer like the bell rings of a shamanistic ritual. Then the video returns to just the sound of breathing, until reaching complete tranquility again.
Since that day on, we can’t help but think of Sewol when we look at the sea. But that doesn’t mean that we can think only about Sewol. However, we can think just about Sewol for the 4 minutes and 30 seconds we are looking at the video. For some, this would give them a sense of relief. There is Sewol in all the seas in the west. The waves that rise up momentarily beyond the tilting light of the sky are so heartrending, perhaps because they resemble the tragedy that abruptly seep into our life, but also because they’re like a form of contact or communication with the faces hidden underneath the waves, their signals saying “Endure. Live on”.
The breathing in the video, which the artist suggests be listened to through the earphones, seems like the breathing of the deceased at a glance, but this cannot be true. The dead do not breathe, and we, knowing that, paradoxically perceive that we are alive through their breaths. We newly recognize, all of a sudden, that the human being is alive and breathing. This is similar to the fact that we only come to realize that the sun moves and the light goes down even in the brightness of the day when we stand in front of the glowing sunset. Glow Breath Warmth stirs up such recognition. It tells us that the sun crosses beyond that sea every day, and that we are alive in the tranquility of light.
And the spectator sees the video, perhaps in their bed before falling asleep, or in the bus on their way home. The enormous ocean, and the light of sky in the distance lower its head and enter the most private place of each person. The breaths, inhaled as the artist heads down then exhaled the moment she arrives at Paengmok port, connects with each person’s respiration. This way of intimately approaching the spectator is also evident in Glowing Hour. In contrary to how the video promoted an encounter by reducing something massive in size, the paintings enlarge what’s small to meet the spectator. The small candle flames envelope us with its fathomless light.
9 large oil paintings surround the small exhibition space, and the spectator steps into the temperature of the sunset–like light that radiates in warmth and brightness. Each painting is an enlarged part of a burning candle flame, presenting a deep spectrum of colors in between yellows and reds, with occasional blues and greys. Vivid brush strokes express the round membrane of light in some paintings, while some paintings are a radiation of heat without form or traces of brush strokes. All this vagueness came from a small candle, and illuminating on something simply begins from there. The candle represents each life, and the surging of the light doesn’t end until a life comes to an end. As if the breath in the video becomes that of the spectator, the light in the painting also becomes their life.
Here, who is the spectator? The spectator is the one who sees the work, or the witness. And in Keem’s work, witnessing is not just about merely looking at something that’s happening in the distance; it’s an act close to forming solidarity. For instance, she drew her acquaintances or their acquaintances in the work Sleeping, where Keem got their photographs of sleeping, but in order to do so, she asked families to photograph each other. Looking into the faces of those whom they love and imagining their deaths, they become the witness of each other’s moments that have not yet come, forming solidarity in death.
Meanwhile, the spectator is above all, those who experience, endure and live on their own. We have seen the sinking of Sewol in the past, and we still pass through the pain of today, here and now. Sewol is not a history that’s past, but has constructed our culture. In that accumulated culture of death, people today remembers that they can always become the victim of tomorrow at any time. Or perhaps a witness that shamefully survived. Or perhaps realize that they can’t lose everything to eternal oblivion again. The glow, breath and warmth embrace them.
In the beginning of this text, I assertively wrote about the intensity of an incident that can and should never be forgotten. However, this is actually something that’s not all that simple, because life goes on. After a loved one died, and being tortured by the sensations of death where the deceased is not forgotten at all but is vividly revived every day, I suddenly felt I couldn’t go on living and wished that I could forget it all. Just then, that sensation faded in my memory like a lie.
This reminds me of another installation, Attitude Forward Remembering in Keem’s second solo exhibition. It’s a work where a strand of yarn sticking out from a sweater hanging in the ceiling unravels one by one during the exhibition, then is round up in a skein again. In short, what becomes untangled in time like that yarn, sometimes definitely helps one to sustain life. However, what comes undone creates another pile, so complete oblivion is impossible. We can’t go on remembering everything, but we can’t live on forgetting everything. We just go on living, leaning on time (Sewol) like Keem did.
While researching Auswitz, Georges Didi–Huberman distinguished the concept of survival and life afterwards². Survival signifies living through an incident one faces, where oblivion can operate as a useful mechanism. But after survival, we must continue living, and go through a time of life in the future. Then how must we survive after the survival? Maybe we can do so by opening up what was concealed for survival, witnessing it, endlessly remembering and testifying.
In that sense, Keem is an artist who makes art “after survival”. Her work helps our life that sunk with Sewol, and the other life beyond it. And the strength that helps the life that follows will surely help our survival also someday. Like the wind, like the breath.
¹Time in Korean is Sewol, which is also the name of the ferry that sank in the disastrous MV Sewol Incident in Korea in 2014.
²Georges Didi–Huberman, Essayer voir, Paris, Editions de Minuit, 2014.
푸르게 비친 빛, 붉게 물든 시간의 빛
최희승
반사된 빛과 배면에 자리한 것들
이 글에서 김지영을 빛을 다루는 작가로 부르고자 한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김지영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빛이 직접적으로 닿아 밝고 선명하게 보이는 부분이 아닌, 어두운 면으로부터 반사된 빛(reflected light)이 비추는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끈질기게 다루는 작가이다. 이러한 간접적인 빛들은 그것이 자연적인 것이든, 인공적인 것이든 본질적으로 서늘한 성질을 띠며, 응달의 빛이라는 본성과 맞물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것들에 잘 달라붙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동안의 작업에서 김지영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일어난 무분별한 개발의 뒤편에서 벌어진 사회적인 재난과 그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들을 다룸으로써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비극을 결코 잊지도, 되풀이하지도 말자는 메시지를 전달해왔다.
김지영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작업을 “사회적인 사건의 배면에 위치한 구조적 문제와 그 사건이 돌출된 양상을 통해 개인과 사회적 사건이 맺는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라고 명확하게 소개하고 있다.¹ 새삼 배면의 의미를 살펴보자면 사물의 등 쪽 혹은 뒤쪽, 즉 정면과 맞닿아 있지만 반대편에 위치한 면을 말하는데, 아주 약간의 각도로도 가려지기 쉬운 곳이자 정면이 설정된다면 필연적으로 생기는 부수적인 부분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배면에 대한 김지영의 주목이 앞서 언급한 반사된 빛이 비추는 면과 유사하게 들리는 것은 결코 어색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부분을 바라보고 마치 액티비스트와 같은 태도로 미술의 언어로 발언해야 하는 부분을 찾아낸다.
빛을 다룸에 있어 김지영은 어둠을 통해 더 강한 빛을 역설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최근작인 〈이 짙은 어둠을 보라〉(2019)는 기도하듯 맞잡은 두 손의 다양한 모습을 초로 만든 조각 작품이다. 60여 개의 군집을 이루는 초의 끝에는 타다 남은 심지가 까맣게 매달려 있는데, 불을 거둬낸 이후의 어둠을 은유하면서 동시에 그곳에서 타고 있었을 촛불을 떠오르게 만든다. ‘이 짙은 어둠을 보라’고 말하면서도 거대한 빛의 열기와 덩어리를 보는 사람에게 상상하게 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인 밝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김지영이 다루는 빛에 대하여 그의 지속적인 주제인 빛의 이면에 위치한 성질과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요소로서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해 살펴볼 수 있다.
대면하는 온기와 열감
그런데 사회 속 우리의 일상에서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미술로서 보이게 한다고 말한다면 김지영의 작업이 매우 단순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이에 대해 직접적인 재현이 아닌 우회하는 재현의 방식을 택함으로써 관람객이 작품의 의미를 스스로 감각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² 예를 들어 〈닫힌 창 너머의 바람〉(2017–2018)은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국내의 화재, 붕괴, 침몰 등 32개의 재난들을 다룬 신문 기사를 현재시점으로 재편집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다. 각 사건의 왼편 첫머리에는 해당 사건이 발생한 날짜와 당일의 일기예보 한 줄이 나타나고, 오른편 기사에는 참사의 규모와 사망자 수가 육하원칙에 따라 서술된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기예보의 태연자약함과 사건의 끔찍함을 건조체로 알리는 기사의 나란함은 순간적인 온도의 간극을 만들어내며 심리적 낙차로 보는 이에게 작용하게 된다.³
김지영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신작 〈붉은 시간〉(2020)은 다양한 측면에서 그의 태도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작품이다. 〈붉은 시간〉은 12점의 시리즈로 이루어진 회화 작업인데, 작가는 흔들리는 촛불의 여러 가지 모습을 80호부터 200호까지 다양한 크기의 캔버스에 유화로 그렸다. 각각의 화면에는 촛불의 머리 부분이 확대되어 있기에 한눈에 형태를 파악할 수 없지만 해가 지고 뜰 무렵의 하늘의 빛을 떠올리게 하는 붉은 색감과 화면을 가득 채운 무수한 터치들이 만들어낸 적색의 그러데이션을 통해 어떤 열감을 전달받을 수 있다. 마치 〈이 짙은 어둠을 보라〉에서 심지 끝에 자리했을 불의 실체인 듯한 이 촛불의 직접적인 재현을 두고 작가는 전처럼 돌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주목한 것은 그동안 우회하는 재현조차도 자신이 사회적인 참사들을 작업에서 다루는 일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감과 무게를 토로해 온 김지영이 직접적인 촛불을 마주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붉은 시간〉을 구상하는 단계에서 회화를 다룸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질 표현하는 행위에 대한 즐거움마저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 시간〉은 세월호를 비롯하여 김지영이 그동안 재난들을 다뤄온 일에 대한 이음표로써 스스로를 되새기는 행위이자 더 넓은 층위에서의 해석을 피하지 않겠다는 작가적인 다짐과 같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김지영의 의도 안에서 촛불이란 더 이상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상징이 아닌 그저 그림의 대상, 즉 빛과 온기를 간직한 소재로 존재하게 된다.
〈빛과 숨의 온도〉(2020)는 인천 바다에서 팽목항까지 서해안의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며 해가 지고 뜨는 바다의 모습을 담아낸 영상 작품이다. 김지영은 일곱 개의 항구에서 각각의 바다를 촬영하였고, 그 위로 사람의 숨소리와 최근 5년 간 자신이 기록한 팽목항의 파도와 풍경소리를 입혔다. 영상의 시선은 마치 한 사람이 우두커니 서서 바라본 바다의 모습처럼 의연하고, 파도의 규칙적인 움직임과 누군가 숨을 쉬고 있는 상태, 매일을 열고 닫는 빛이 만들어내는 붉고 푸른 색감들은 당연하면서도 특별한 ‘살아있음’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어폰과 스마트폰을 통해 보는 사람 각자의 호흡과 조금 더 가까이 마주하기를 제안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김지영은 자신의 작품 안에서 빛을 다루고 있다. 때로는 어슴푸레한 빛을 따라가면서, 때로는 실재보다 더 밝은 빛을 상상하면서, 때로는 현실의 빛을 직접 마주보면서. 결코 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미술의 언어로 말해져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김지영은 믿는다.⁴ 그리고 그의 작업은 결국 미술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을 표현하는 일이었음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이전의 작업들에서 그가 우회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남겨두었던 자신의 피난처를 스스로 없애 더욱 절박하게 그려진 〈붉은 시간〉.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또한 작품의 붉은빛이 지닌 열감과 온기를 대면하여 바라보기를 권하고 싶다. 눈이 조금 뻐근해지더라도 말이다.
*이 글은 2020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입주 작가 비평글을 기반으로 전시에 맞게 다시 작성되었습니다.
¹국립현대미술관, 『젊은모색 2019: 액체 유리 바다』, 2019, p.178.
²목정원, 「재현불가능한 것을 우회하는 재현들–리오타르와 랑시에르를 넘어서–」, 『예술과 미디어』 vol.18, no.2, 2019, pp.121–136.
³일례로 〈닫힌 창 너머의 바람〉(2017–2018), 10p 왼편에는 “1953년 1월9일, 살을 에는 추위, 바람이 많이 불겠다.”로, 오른편에는 “9일 오후 10시 20분께 부산 사하구 다대동 다대포 앞 해상에서 (중략) 창경호가 침몰하여 선장과 선원 3명, 중학생 2명, 군인 1명을 제외한 300여 명이 사망, 실종한 대참사가 일어났다.”로 글을 열고 있다.
⁴‘선할 수 없음’은 김지영의 첫 프로젝트 ⟪선할 수 없는 노래⟫(2015.3.6–3.27, 사무소 차고)의 제목에서 빌려온 것이다. 당시 작가가 직접 쓴 전시 서문에는 “고여만 가는 오늘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선한 눈물의 무력함이 아닌, 이기적인 용기의 최선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Light as Bluish Reflection, Light as Red Temporality
Choi Heeseung
Reflected light and things on the backside
This text intends to denominate Keem Jiyoung as an artist who deals with light. To elaborate, Keem’s subject of attention and tenacious exploration is not the pronounced areas directly hit by light but those dimly lit by light reflected off a dark plane. These types of indirect light, whether natural or artificial, are fundamentally cold in property having derived from the shade and tend to adhere to things that share similar qualities. Shedding light on the victims of social catastrophes that took place in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 behind the scenes of senseless development, Keem has urged through her works never to forget or repeat these tragedies.
Keem has often introduced her works specifically as those “focusing on the structural issues behind social incidents and how they come to fore to address the relationship between personal and social events”.¹ To revisit the meaning of “behind” for the sake of formality, it refers to the backside of an object that is in contact with the front side but is situated in the opposite direction, also understood as an area that’s easy to hide with a tilt of an angle or an inevitable byproduct of a foreside should one be postulated. It shouldn’t come across as odd that the artist pays attention to the backsides of things as the concept intersects with the aforementioned areas lit by reflected light. With an attitude of an activist, she gazes at areas untouched by the spotlight and determines what must be said through artistic language.
It also seems that, in dealing with light, Keem uses darkness to paradoxically emphasize light. Her recent work Look at This Unbearable Darkness (2019) is a series of candle wax sculptures of two hands put together in various praying positions. At the tips of these 60–some hand sculptures presented in the form of a congregation, there remain burnt wicks of the melted candles, alluding to the darkness that would have fallen after the light had been put out while also reminding of the flame that must have been burning there at one point. While demanding to “look at the deep darkness”, the work triggers imagination of the giant sphere of light and heat in the viewers to present an image of brightness in a more effective way. Light as handled and persistently explored by Keem can be examined in two ways: as a quality of something situated on the backside of light and as an element directly implicated in her works.
Confronting the heat
It may be an oversimplification to say that Keem’s works make visible as art the invisible or things hiding in the shadows of our society and daily lives. By choosing to circumvent the subjects rather than directly representing them, the artist invites the viewers to sense the meaning of the works for themselves.² One example would be Wind Beyond the Closed Windows (2017–2018), a compilation of newspaper articles on the 32 social disasters that occurred from the 1950s to the 2010s including fires, collapses, and sinkings, re–edited from the present point of view. On the top left of each article are the date of the incident and a line of the weather forecast. Stated to the right are the extent of the crisis and the number of casualties according to the Six W’s. The indifference of the weather forecast as usual, next to the calm and collected voice of the article narrating the horrific incident, creates a momentary discrepancy in emotional temperature to act as psychological pressure on the reader.³
Keem’s new work, Glowing Hour (2020), offers an idea of the artist’s changed attitude in many ways. Consisting of 12 oil paintings, this series captures glowing candlelight in different moments on various–size canvases from size 80 (approx. 145 x 100 cm) to 200 (approx. 260 x 180 cm). Each frame depicts the wick portion of the candle, enlarged to the point where the form can’t be detected at a glance, but the shades of red filling up the canvas reminiscent of the sky at dawn or dusk and the gradation of the shades created by the countless brushstrokes emit a sense of heat. Seeing these direct representations of a candle, the same subject of fire implied by the wicks of the candle sculptures Look at This Unbearable Darkness, it’s almost as if the artist has forgotten how to make an indirect statement.
What’s notable is the fact that Keem, who has mentioned the deep sense of responsibility and weight she feels in dealing with social calamities even in the form of circumventive representation, is now confronting the candle head–on. In the initial stage of this new project, she showed reservations even about the joy of expression that the act of painting itself might bring her in painting these subjects. Nevertheless, Glowing Hour feels like a dash connecting the catastrophes Keem has dealt with including the Sewol ferry disaster, an act equivalent to reiterating the incidents to herself, or an artistic resolution not to dodge interpretation of the incidents on a broader level. And within the context of this intention, a candle no longer serves as a political or social emblem but a mere object for depiction, that is, a material subject characterized by qualities such as light and warmth.
Glow Breath Warmth is a video work which captures the sea, taken along the western coastline of Korea as the artist moved from Incheon to Paengmok Port. Keem recorded the sea from 7 different ports, then superimposed over the video sounds of human breathing, and the video footage and sounds of the waves and the ocean from Paengmok Port the artist recorded in the last 5 years. The gaze in the video, as if it’s that of someone standing and looking at the sea vacantly, reflects honor and dignity while the rhythmic movement of the waves seems to signify the state of human breathing. The reds and blues created by the light that opens and closes each day reminds us of the state of “being alive”, which is so priceless yet often taken for granted. In this exhibition, the artist hopes for the work to intimately near the audience’s own breathing, through earphones and smartphones.
Working with light, Keem sometimes chases after a dim version of it, sometimes imagines it to be brighter than in reality, and sometimes stares straight into the reality of it. Keem believes that even though the deed may never “be good” (as in innocent or innocuous), there are things that need to be said in the language of art.⁴ Her works are reminders of how art is a practice of visualizing the invisible light. Glowing Hour feels more desperate in that the artist voluntarily rid herself of the sanctuary she had secured by taking roundabout approaches in her previous works. Hence, it is encouraged that the viewers also look straight into the heat embodied by the red in the work, even if it takes a little toll on their eyes.
¹MMCA, Young Korean Artists 2019: Liquid Glass Sea, 2019, p.178.
²Mok Jungweon, “Representations that Circumvent the Unrepresentable: Beyond Lyotard and Rancière”, The Korean Journal of Art and Media 18, no.2 (2019), pp.121–136.
³For example, the weather forecast on the left side of page 10 of the compilation reads, “January 9, 1953, nipping cold, possible strong wind”, and on the right side, the article begins with “At around 10:30 p.m. on the 9th, Changgyeong ferry foundered into the sea near Dadaepo Beach, Dadae–dong, Saha–gu, Busan…This disaster took the lives of more than 300 people excluding the captain, three sailors, two middle schoolers, and a soldier”.
⁴Referring to the phrase “unable to be good” from the title of Keem’s previous project Song Unable to Be Good (March 6–27, 2015, Samuso Chago). The introductory statement for the exhibition written by the artist at the time states, “Perhaps what we need to stop the series of todays from just pooling around us is not innocent tears of impotence but the best of selfish courage”.
내일의 공명(共鳴)
김선옥
기록은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를 배반했을 때 그 존재의 가치가 드러난다. 진실은 침묵한다. 그래서, 우리는 낯익은 것에 무뎌짐과 오래된 친숙함을 의심해야 한다. 기록으로 마주하는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시간을 열고, 다시 도래할 가능성을 증언한다. 과거는 어쩌면 미래를 예비하고 있는 가정된 시간일 것이다. 김지영은 과거의 흔적을 현재의 감각으로 제시한다. 그는 시간성을 단순히 복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과거와 다르게 현시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래서, 이것은 과거와의 단순한 대립에서 벗어나며, 과거는 종결된 것이 아닌 현재, 그리고 미래의 어느 순간에도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인 역사라는 것을 환기한다. 김지영의 작업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다시) 볼 수 있게 만들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다시) 말할 수 있게 만든다.
“여전히 울고 있는 풍경처럼, 나의 서툰 치열함이 그 울림에 더해져 기울어진 윤리에 균열을 낼 수 있기를. 그리고 부지런한 치열함으로 보다 많은 소리들이 더해져 그날을 가린 두터운 오늘을 부수고, 비로소 드러날 오늘을 간절히 고대한다.”
–김지영, ⟪선할 수 없는 노래⟫(2015) 서문 중
1. ‘여기에 있다’는 것
나에게 ‘바다’는 이제 5년 전의 그 바다가 아니다. 김지영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참사가 일어나고 1년 후, ⟪선할 수 없는 노래⟫(2015)에서 그는 이전과 ‘달라진’ 바다를 그렸고, 벽면에 그림을 거는 대신 공중에 매달았다. 우리의 시선을 빗겨 나가 고개를 들어올려야 볼 수 있는 높은 곳의 바다는, 그렇게 차마 쉽게 마주할 용기조차 없는 무거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바다〉(2015)) 차고 안 낡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메마른 화분들은 몇 개월 후 다른 전시장의 경사진 바닥에 이리저리 쓰러져 있었다. 화분에 심어진 이미 메말라버린 식물들은 그렇게 점차 극도로 무력해 갔을 것이다. (〈오늘의 성장〉(2015))
파도는 바다에서만 인다. 바람이 만들어지기 쉬운 드넓은 바다는 파도를 항상 품고 있다. 언제 매섭게 올라올지 모르는 파도는 그래서 두려움의 대상이다. 김지영이 그린 검고 검은 물결은 힘없는 미물들을 한꺼번에 삼켜버린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자태로 여전히 넘실거린다. 작가가 목탄을 몇 번이고 뭉개고 짓이겨 그렸을 그림은 손의 감각으로 비극을 스스로 마주하기 위해 가까스로 낸 용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대면한 것은 무릇 죽음에 대한 공포만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의 절망을 넘어, 우리 사회에 너무 만연하게 존재하고 있는 폭력에 대한 분노에 가까울 것이다. (〈파도〉(2015))
트라우마는 상실감과 무력함을 동반한다. 충격에서 벗어나기 가장 쉬운 일은 어쩌면 빨리 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을 질끈 감으면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잊고 싶은 기억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부정하고 싶은 욕망에 맞서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는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며, 슬픔의 공감을 넘어서는 애도의 행위이다. 시혜적인 태도는 결코 애도가 아니다. 슬픔을 극복하는 슬픔은 선량함으로 포장된 연민이 아닌, 다른 방식이어야 한다. 두 눈을 부릅뜨고 보기 위해서 몸부림칠 때, 고통에 무감각함을 경계하고 비극을 마주하는 작가의 태도에서 우리는 다시금 남아 있는 자들의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그래서, 남아있는 우리는 모두 결코 선할 수만은 없다. 현실을 미술의 언어로 직시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미술의 또 다른 가능성이다.
2. ‘거기에 있다’는 것
김지영은 2014년의 참사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이와 유사한 패턴의 사건들이 그동안 한국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한 원인을 사회 구조적 문제 안에서 되짚기 시작한다. 1950년대부터 일어난 수많은 대형 참사와 재난은 사회 시스템 문제에서 비롯되었고, 작가는 이것이 언제 다시 되풀이될지 모르는 사회적 비극의 잠재적인 징후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국가 제도는 몰락하고, 책임 윤리가 실종된 한국은 ‘위험사회’가 되었다. 세월호 참사의 한 유가족은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국가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국가는 지금 부재중’이라고 답했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표현한 것처럼 “공적 영역이 빛을 발할 능력을 상실한” 시대를 의미하며, 이런 상황에서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이 강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하기’로, 타인에게 전달되는 와중에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움직임을 의미한다.¹
〈파랑 연작〉(2016-2018)은 기존의 관성화된 보도 사진에서 일부분을 의도적으로 배제해서 왜곡된 이미지에 문제를 제기한 오일 파스텔화 시리즈이다. 참사의 장면을 사실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사후 시점에서 미디어의 카메라 앵글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미지이다. 보도 사진들이 배포된 날짜가 재난이 일어난 다음 날의 날짜로 출력되는 반면, 작가는 〈파랑 연작〉의 각 제목에 사건이 발생한 당일의 날짜를 써넣음으로써 그 시간을 현시하기 위한 노력을 숨기지 않는다. 미디어 이미지의 속성을 파괴하고 재생산한 김지영의 그림은 우리가 보고 있는 이미지를 재변용한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미디어가 재현한 이미지를 우리가 다르게 인식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변성적(變性的) 이미지’²라 할 수 있다. 보도 사진은 현실을 가장 극적으로 재현한 ‘스펙터클화’ 된 이미지이다. 그래서, 미디어가 이미지를 생산하는 방식은 폭력적인 재현 방식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 사유할 수 있는 입구를 완전히 차단하고, 이미지를 독해조차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반면, 김지영의 그림은 미디어가 선정적으로 재현한 부분, 가령 일방적으로 대상화시켜버린, 현장에서 무분별하게 찍힌 개인들을 삭제함으로써 그 공백을 우리가 스스로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미지의 권능은 미디어에서 가장 강력하게 작동한다. 김지영의 작업은 세계 전체의 극히 일부분만 보여주는 단일한 미디어 이미지에 저항하고, 우리가 보는 것이 모두 진실인 듯 왜곡하는 미디어의 기만을 반증한다. 보도 사진에 찍힌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낸 후 정방형의 프레임에 담은 〈파랑 연작〉은 프레임의 경계에서 이미지를 재규정한다. “이미지의 프레임도 하나의 간격으로 작동한다. 프레임은 이미지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간격이다. 그런데 이 간격을 단순히 정적인 경계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지의 내부와 외부는 프레임을 결정하고 확립하는 행위로부터 비로소 생성되기 때문이다.”³ 작가가 파란색의 단색으로 그린 아비규환의 현장은 굉음의 순간을 적막의 장면으로 제시하며, 역설적으로 여백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보도 기사의 자극적이고 불필요한 텍스트를 일부 소거한 〈닫힌 창 너머의 바람〉(2017-2018)은 인용과 편집의 과정을 거친 책 작업이다. 〈파랑 연작〉과 더불어 김지영이 선택한 몽타주 방식은 기존의 이미지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보고, 읽어야 할 이미지를 제시한다. 보도 사진과 기사를 가지고 작가가 시도한 재배치는 우리가 절대적이라 믿고 있었던 환영을 교란하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을 확장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생산한다. 따라서, 그가 시도하는 이미지의 변용은 미디어 권력에 대항하는 이미지로 작동한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이미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여러 층위에서 (다시) 읽는 것이다.
3. 그리고, ‘다시 한다’는 것
김지영은 세월호 참사 5주기 추념전 ⟪바다는 가라앉지 않는다⟫(2019)에서 〈4월에서 3월으로〉(2015)를 ‘다시’ 그렸다. 〈내일의 날씨〉(2019)는 〈닫힌 창 너머의 바람〉(2017-2018)의 도입부인 사건이 발생했던 날들의 실제 일기 예보를 프린트한 미러 필름을 유리창에 붙여 시각 이미지로 ‘다시’ 현현한 것이다. ‘다시 한다’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간의 횡축을 움직여 과거의 작업을 현재 손의 감각으로 다시 만드는 것이 작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어떤 일이 반복되고, 되풀이되는 상황은 그것에 반응하는 감각 자체를 점차 무디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감각해짐을, 결국에는 망각에 이르게 만든다.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사회 구조적 문제들을 인식하지 못하기 시작할 때, 진실은 더욱더 쉽게 휘발될 것이다.
김지영은 망각에 저항하기 위해 다시 만든다. 작가에게 ‘재제작’의 행위는 과거를 현재의 감각으로 소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순간을 현시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식은 ‘여전하면서도 다른’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이미 어떤 선택의 행위이고, 편집의 행위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미지는 상상하는 행위, 즉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미지를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행위를 읽는 것을 뜻한다. 이미지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이미지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것이 관건이다.”⁴
김지영은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재현’의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그것을 이미지로 먼저 마주하게 만든다. 또한, 도상을 이용한 회화적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텍스트, 설치,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과거를 현재에서 여러 층위로 감각하고자 한다. 그래서, 작가가 선택한 매체는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기 위해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언어인 것이다. ⟪젊은모색 2019: 액체 유리 바다⟫(2019)에서 보여준 진도 팽목항의 풍속을 bpm으로 변환한 사운드 작업 〈바람〉(2015/2019)은 ⟪기울어진 땅 평평한 바람⟫(2015)에서 선보였을 때와 다르게 다채널로 배치하는 방식으로 바람의 세기를 감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바람의 기록이 둘러싸고 있었던 〈이 짙은 어둠을 보라〉(2019)는 서로 꼭 맞잡은 두 손의 형상을, 녹아내린 촛농이 감싸고 있는 조각이다. 목탄, 오일 파스텔처럼 초는 작가가 손으로 직접 감각하고, 재료의 물성이 가시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이미지로 만들기 위한 선택이다. 특히, 이 작업은 김지영의 기존의 작품들보다 이미지에 도달하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빨라졌다고 느껴지는데, 도상의 강한 상징이 직관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재현의 형식은 우리와 이미지 사이의 거리를 결정한다.
작가가 시도하는 것은 미술을 통해 ‘미술 아닌 것’을 현시하기 위한 미술이다. 여기서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재현 불가능한 것의 재현 당위성의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왜’ 그리고, ‘어떻게’ 재현하는지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1970년 4월,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는 매거진 『Afterimage』에 기고한 선언문 〈Que faire?〉(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정치적인’ 영화와 ‘정치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을 구분하였다. 전자는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세계를 이해시키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반면, 정치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진실을 왜곡해서 이미지를 만들지 않되, 현실을 구체적으로 해석해서 보여주고 세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과거 어디에서 왔는지, 영화를 통해 우리의 위치를 (재)확인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의지라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미술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미술은 지극히 미술의 방식으로, 정치적으로 작동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고다르가 이야기한 것처럼 정치적인 예술이 되어서는 안 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예술의 역할일 것이다. 재현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세계를 재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과거의 종언을 넘어 현재의 발언이 될 때, 미술은 그 가능성을 스스로 증명하고 실천할 것이다. 한낱 신기루 같은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미술의 언어로 현실의 구조를 재배치하고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 그것이 미술에서 할 수 있는 발언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아직도?’라고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영이 지속하는 행위는 비극이 ‘아직도’ 진행 중임을 직시하는 기록의 동력이며, 앞선 우문에 반문할 수 있는 미술의 힘이다. 작가의 울림이 여기서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비록, 세계에 부딪히고 되울려 나올지라도, 그들이 겪는 고통의 울림을 위로하고, 우리에게 다른 울림을 줄 수 있는 그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반복될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놓치지 않도록 미세한 신호를 계속 던질 것이다.
*2019 SeMA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비평 프로그램 –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¹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반딧불의 잔존』, 김홍기 역, 도서출판 길, 2012, pp.147–148.
²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김상운 역, 현실문화, 2003, pp.46–52. 미술의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성’은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에 따르면 크게 세 범주로 정리할 수 있다. 대상을 직접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예술적이라고 할 수 없는 ‘벌거벗은 이미지’, ‘여기에 있다(Voici)’는 현전을 통해 대상을 지시하는 ‘직시적(명시적) 이미지’. 그리고 이것에 대립하는 ‘거기에 있다(Voilà)’는 ‘변성적 이미지’로, 예술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념을 보여준다.
³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반딧불의 잔존』, op. cit., p.171.
⁴앞의 책, p.167.
A Resonance of Tomorrow
Kim Seonok
A documentation paradoxically unveils its value when its familiarity betrays us. A truth is silent. Therefore, we need to question our insensitivity and old intimacy toward the familiar. The past we confront with documentation opens a time of the future and witnesses the possibility of returning. The past is probably the assumed time that prepares for the future. Keem Jiyoung proposes traces of the past into the senses of today. Not only does she return to recuperate temporality, but she also raises questions by presenting the subject that is different from the past. Therefore, it is free from a simple conflict with the past, and it arouses a past that is a potential history which can happen in any moment today or in the future, rather than being something that has concluded. Works by Keem Jiyoung let us see (again) things we cannot, and to speak about things (again) we cannot.
“As if the scene still cries, I sincerely hope that I can break a skewed morality as my unskilled enthusiasm is added to its echo. I desperately hope that so many voices of people can be added with persistent enthusiasm, breaking our thick present that conceals the day, revealing a new present at last.”
–Keem Jiyoung, preface from Song Unable to be Good (2015)
1. ‘Being here’
To me, the sea is no longer the same as the sea from five years ago. It must be the same for Keem Jiyoung. One year after that tragedy (Sewol Ferry’ sinking), she represented a ‘changed’ sea from the project Song Unable to be Good (2015), and she hung her work in the air instead of installing it on the wall. A sea up on high that can be seen only if we raise our heads becomes a heavy existence we cannot easily confront [Sea (2015)]. A couple of dried plants that were nicely placed on top of an old table in a garage have collapsed everywhere on a slanted floor of a different exhibit area. These dried plants must have become slowly yet extremely helpless. [Today’s Growth (2015)]
A wave only rises in the sea. A vast sea that makes a great wind always carries waves. Waves are feared because we do not know when they become fierce. Keem’s black waves calmly surge as if nothing happened, after gulping so many fragile little things. She must have had the courage to crash and stamp down charcoal multiple times in order to feel this tragedy herself. Furthermore, what she experienced may not just be the fear towards death in general. It must be close to an anger towards violence that commonly exists today in our society, beyond the hopelessness of agony. [Wave (2015)]
Trauma accompanies a sense of loss and powerlessness. The quickest way to get away from this trauma might be to forget about is fast. However, it does not vanish forever, even though it does not appear for now if eyes are closed tight. A willingness to remember by standing up against a desire of denial needs courage. It is an act of mourning, beyond sympathy of sorrow. An act of charity is never a mourning. A sorrow overcoming pain should take a different approach than sympathy that is decorated with virtuousness. Struggling to see with eyes wide open, Keem’s attitude of facing the tragedy and alerting us to the insensibility of pain, signifies our strong responsibility as those who remain. Therefore, we as remainders, cannot always be good. Looking squarely on a reality through the language of the arts, is another possibility that art can carry.
2. ‘Being there’
Keem recognizes that the tragedy in 2014 did not just happen out of nowhere. She then began to look back at similar incidents that repeatedly happened in Korea, and found the reason within our social structure. Great tragedies and disasters since the 1950’s came from problem in the social system, and Keem presents this as the potential symptom of social tragedies that are as yet unknown and will repeat in the future. Korea has become a society at risk as its national system collapses and ethical responsibility is lost. During an interview, one of the bereaved family of the Sewol ferry disaster answered the question ‘what is this country for us?’ with ‘our country is in absence right now’. This represents an era as Hannah Arendt expressed, “a public realm that loses its ability to emit light”, and as Georges Didi–Huberman emphasized, “‘nevertheless, act on’ to have meanings while getting delivered”.¹
Blue Series (2016-2018) is a painting series with oil pastel that bring questions through distorted imagery that intentionally excludes portions of the press image photographs. It is not about representing scenes from a tragedy realistically, but rather it is about images that present camera angles from the perspective of media after the incident. Unlike how press images are released with the data of a day after the tragedy, Keem puts the actual date of an incident in her titles in Blue Series, in her notable effort to uncover a particular time. Keem’s work which destructs and reproduces properties of media images is a form of re–transformation of the image in our sight. This is called the ‘metamorphic image’² in that the original images from media can be perceived differently by us. Press images are ‘spectacle’, ones that represent reality dramatically. Therefore, a way that media produces images is through violent representation; it completely blocks the entrance where we can think through images and makes us powerless and even incapable of reading the image. On the other hand, in order to let us imagine the void, Keem’s work deletes individuals who are thoughtlessly photographed onsite―individuals that the media reproduces sensationally and targets unilaterally.
The power of an image works most powerfully in media. Keem’s work resists a one–sided media image that only represents an extremely small part of a whole, and disproves the deception of media which distorts as if everything we see were the truth. Blue Series, which cuts out unnecessary parts in press images and position them in square frames redefines the images in a boundary between frame. “A frame of an image operates as one interval. A frame is an interval that separates the internal and external of an image. However, this interval cannot be understood only as a static boundary, because internal and external parts of an image which sets the frame are generated from an action.”³ As Keem represents the scene of an accident with complete pandemonium in monochromatic blue, she presents a moment of a silent roar, and paradoxically creates a moment of blankness.
Wind Beyond the Closed Windows (2017-2018) partly deletes sensational and unnecessary texts from the news. It comes in the form of a bookwork that undergoes the process of citation and editing. Along with Blue Series, Keem’s montage deconstructs original images then recomposes them to present images that we need to see and read. A rearrangement Keem sought with press images and news, disturbs an illusion we believed as absolute and produces images and texts that expand parts of our imagination. Therefore, an image transformation that Keem presents works as an image that opposes media power. Now our role is to re–read what images do in multiple layers.
3. And ‘Re–doing’
In a memorial exhibition for the 5th anniversary of the Sewol ferry disaster, The Sea Will Not Sink in 2019, Keem re–painted From April to March (2015). Tomorrow’s Weather (2019) is a work manifested as a visual image which she pasts on the window―the text of the actual weather forecast from the day of the tragedy [which is also introduction part of Wind Beyond the Closed Windows (2017-2018)] printed onto mirrored film. What does a ‘re–do’ represent? What does moving across an axis of time do to re–do the past in the present? What does this mean to Keem, and to us? Something that repeats and repeatedly happens desensitizes us. Therefore, familiarity brings insensitivity, and an oblivion in the end. The truth will easily evaporate when we begin to not recognize the problems of a social structure that repeats.
Keem repeats in order to resist oblivion. To her, a ‘re–do’ is to recall the past in the present. Therefore, her chosen method in order to uncover the moment is to present an ‘unchanged yet different’ image. “An image is already an act of choosing, and an act of editing. In this respect, an image is an act of imagination and creation. Reading an image therefore signifies reading this action. It is not about recognizing what this image is, but rather it is about recognizing what this image does.”⁴
As Keem chooses a method of ‘representation’ in order to recall the past, she confronts it with an image first. Furthermore, she does not remain within strict pictorial representation of icons, but rather uses numerous mediums such as texts, installation, and sound to perceive the past in terms of multiple layers of the present. Therefore, Keem’s chosen method is an inevitable language that can only be used right at this moment. Young Korean Artists 2019: Liquid Glass Sea (2019) exhibition presents Keem’s sound work Wind (2015/2019), which transforms the wind speed from Paegmok port to bpm; the work is different from how it was first presented in her Tilted Land Even Wind (2015) exhibition in that its new iteration enables viewers to sense the strength of the wind with multiple layered channels of sound. Moreover, Look at This Unbearable Darkness (2019), a work surrounded with records of the wind, is a sculptural work composed of two hands that are clasped together and covered in melted candle wax. Keem senses a candle as a medium directly with her hands just like she does with charcoal and oil pastel. Her choice to represent an image along with a material property is clearly illustrated. Particularly in this work, the speed of reaching towards an image becomes relatively faster than in her previous work―I believe that it is because the powerful symbol of an icon is used. The form of a representation determines a distance between an image and us.
What Keem experiments with is to make art that reveals a ‘non–artistic thing’. What we should question here is not the appropriateness of the representation of the unrepresentable, but rather about ‘why’ and ‘how’ to represent.
There is an article named Que faire? (what has to be done?) written by Jean–Luc Godard in Afterimage. In April 1970, Godard differentiates ‘political’ movies and filming ‘politically’. The former describes a reality realistically (or as it is) to help the understanding of the world and to tell the truth. On the other hand, filming ‘politically’ is not to distort the truth and make images, but to interpret a reality in detail and to question the world. Thus, it means to (re)confirm where we stand now and where we came from in the past through films―and is a will to eventually change the world.
What does it mean to do art ‘politically’? Art should operate ‘politically’ as it does exceedingly in artistic ways. As mentioned by Jean–Luc Godard, rather than being political art, art should take on a role of endlessly questioning ‘what has to be done?’. As it is important to make the world representable rather than being merely stuck in representation, when art becomes the speech of the present over the past, it will be able to prove and carry out its possibility. Not staying in an image that is like a mirage, it is about rearranging the structure of reality and reorganizing the world with the language of art; that is what can be said in art.
People still question whether or not we should still be thinking about this as an issue. Nevertheless, what Keem continues to work on is the power of documentation that directly confront the fact that tragedies are still ongoing. This is the power of art that can answer. I hope her echo does not stop here. Although it hits the world and rebounds back, the echo which only begins to appear when her voice is constantly being repeated, consoling the cry of their pain and giving us another reverberation will continually send us subtle signals so that we don’t miss the world.
¹Didi–Huberman, Georges, trans. by Kim, Hong–ki, Survivance des lucioles, Book Gil, 2012, pp.147–148.
²Rancière, Jacques, trans. by Kim, Sang–un, The Future of the Image, Hyunsil Book, 2003, pp.46–52. According to Rancière, ‘image’ can be classified into three major categories: ‘naked image’ that does not constitute art, in order to represent the subject directly; ‘Voici’ is ‘ostensive image’ that directs through presence; and its exact opposite, ‘Voilà’ as ‘metamorphic image’ representing an idea of relations between art and image.
³Didi–Huberman, Georges, Survivance des lucioles, op. cit., p.171.
⁴Ibid, p.167.
세월호 이후의 미술실천
정은영
“전국이 흐리겠으며 남부지방에는 비 오는 곳이 많겠다.”
은박으로 단정히 재단된 ‘기상예보’의 문장이 유리창에 가지런히 붙어 있었고, 창 너머의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정말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잔뜩 가라앉은 창밖의 풍경과 유리를 타고 미끄러지기 시작한 빗줄기 위로 겹쳐진 이 문장이 비범해지는 순간이었다.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 내려갔다.
“전국이 흐리겠으며 남부지방에는 비 오는 곳이 많겠다.”
세월호 참사 5주기 추념전의 서울 전시가 열리던 지난 4월 9일의 일이었다. 여느 전시의 오프닝과는 달리, 창밖의 풍경만큼이나 창 안의 풍경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재난을 애써 말하는 자리, 그것을 잊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자리, 상실의 슬픔 따위는 떨쳐내고 어서 산 자들의 일상으로 돌아오라는 충고가 아니라 이 서러운 상실을 재차 기억하고 애도할 것을 주장하는 이 자리는, ‘미술’이라는 재현의 체계 또한 ‘세월호’라는 특정 사건을 위시한 재난과 상실의 고통에 직면해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이 문장은 단지 날씨를 알리는 서술을 넘어 참사의 그날을 현재로 소환하고, 어떤 심연의 슬픔을 일깨워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정치적 문장으로, 그리하여 이 슬픔의 정치가 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의지의 문장으로 점차 변해갔다.
〈내일의 날씨〉(2019)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세월호 추념전이 열리는 몇몇 전시장의 유리창 곳곳에 자리했다. 각 문장은 모두 세월호와 유사한 특정 재난과 참사가 벌어진 날의 기상예보이다. 김지영은 세월호 참사 이후 거의 실어증에 가까운 그 침묵의 당혹감을 이해해 보고자 팽목항으로 향한 적이 있다고 했다. 영문 모를 두려움에 잠식된 두 계절을 이미 보내고야 난 다음이었다고 했다.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어느 특별하고 잔혹한 바다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바다였다. 간혹 방향을 바꾸는 꾸준한 바람에 실려 오는 비릿한 바다의 냄새, 무한히 반복적인 움직임과 소리를 실어 나르는 파도, 아름다운 빛이 부딪쳐 바스러지는 수면을 보며 작가는 이 비통함 뒤에도 여전한 그 바다가 이상했다. 그는 매일매일의 날씨를 기록했고, 자꾸 바다를 그렸다. 맑은 뒤 구름이 많아질, 눈 또는 비가 내릴, 점차 흐리고 또 개일, 혹서의 혹은 혹한의, 밝고 고요한 바다와 어둡고 무서운 바다를, 시시각각 움직이고 변하는 파도를, 매일매일 바다 위를 떠도는 바람을, 바다 밑에 수장된 비통한 목숨들의 미명(微鳴)을.
김지영은 팽목항이 보여준 변함없는 바다를 보며 하나의 신념을 따르기로 한다. 침묵하지 않겠다는, 협상하지 않겠다는 재현의 의지이다. 김지영의 첫 프로젝트 ⟪선할 수 없는 노래⟫(2015)는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는 아도르노식의 ‘재현 불가능성’에 맞서 기꺼이 “선하지(윤리적이지) 않음”을 선택하기로 한다. 이즈음 더욱 절박해져 가는 세월호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의 투쟁은 날마다 고통의 수위를 갱신해갔고, 세월호를 둘러싼 언설들은 자주, 발설되어서는 안되는 ‘곤혹’에 가까운 것이 되어갔다. 김지영의 첫 번째 개인전 ⟪기울어진 땅 평평한 바람⟫(2015)은 그럼에도 미술가의 소임은 다름 아닌 ‘재현 가능성’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함을 용기 내어 제안한다. 참사 이후 매일매일의 풍속을 기록해 비트로 전환한 북소리(〈바람〉(2015))가 살아 숨 쉬는 이들의 맥박처럼 가슴을 치고, 위태로운 기울기를 한 바닥을 타고 미끄러지는 물방울(〈바닥〉(2015))이 어느새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로 자리를 바꾼다. 검은 목탄 가루가 빈틈없이 눌려 들어찬 시꺼먼 바다(〈파도〉(2015))와 가만히 눈을 감은 얼굴(〈수면〉(2015))들을 마주하며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다가올 죽음을 사유할 수 있는 우리는, 미술의 오랜 뿌리인 ‘재현(mimicry)’이 비로소 ‘재–현(re–presentation)’으로 확장되어감을 감지하게 된다.
김지영의 이러한 재현의 태도는 2016년부터 시작된 〈파랑 연작〉(2016–2018)으로 이어져 두 번째 개인전 ⟪닫힌 창 너머의 바람⟫(2018)에서 물러섬 없이 단호해진다. 종이 위를 수천수만 번 오갔을 오일파스텔의 힘센 획들이 강렬한 마찰의 흔적을 남기며 참을성 있게 재난의 풍경을 그려냈다. 거칠고 뿌연 이미지로만 남아있을 먼지투성이의 아카이브로 깊숙이 들어가, 이 반복되는 재난의 구조를 밝혀주리라 기대되는 자료를 들추고 그러모아 보고 또 보고 곱씹어 읽는 행위, 그 집요한 수행이 그림을 그려내는 손의 수행으로 이동한다. 꾹꾹 힘주어 누르고 때론 가벼이 미끄러지며 형태와 부피를 조형해내는 손의 감각과, 수 겹의 지층을 켜켜이 비축하거나 뜻밖에 발색하는 오일파스텔의 묵직한 정서가 큰 내적 울림을 불러낸다. 이 고통스러운 이미지들로부터 끝내 도망치지 않은 화가의 책무를 쉬이 지나칠 수 없다. 고통을 재현하기 위해 그 고통에 마주해야만 하는 더 큰 고통의 역설을 넘어서는 일은 아마도 내내 쉽지 않았을 것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이 집요한 재현의 의지가 종종 ‘희망’이며 동시에 ‘우울’인 푸른색의 모노톤 회화로 다시–현현(re–presentation)해 우리를 찌른다.
김지영의 작업은 몫 없는 이들이 처한 고통의 감각이나 그것을 발생시키는 부조리한 구조를 재현해 온 경향이 짙다. 재난의 역학을 파헤치는 일만큼이나 재현의 방법론을 부단히 다시 구성하는 일은 그에게 매우 중요하다. 작가가 마주한 최초의 사건들로부터 그 사건들을 명명백백하게 기억하고자 하는 끈질긴 노력을 경유해, 사건의 안팎을 요동치는 슬픔의 정동에 적극적으로 감응하는 성찰적 개입의 시간을 보내는 것, 다만 슬픔의 감정을 넘어 기꺼이 그에 연대하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구성해내는 것이야말로 작가가 재현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가까이 다가서고자 한 것이었을 테다.¹
그런데 이제 막 자신의 양식을 단단히 구축하고 예술적 커리어를 시작해 나가는 소위 ‘신진작가’가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세월호 이후, 침몰하는 배의 은유는, 쉴새 없이 출렁이는 물의 이미지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형상은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관습적 은유는 종종 반윤리가 되고, 안온했던 이미지가 뜻밖에 정치적이 되어가는 이 시대, 김지영의 미술 실천은 ‘윤리적 재현’이라는 하나의 정언명령을 향한 도전이 될 수 있을까? 이 고통 속에서도 끝내 살아내야 하는 이들, 재난 그 이후, 슬픔의 주체로서 ‘남겨진 자’들을 위한 재현의 윤리를, 그는 다시 구성해 옹호할 수 있는 것일까? 작가 김지영의 새로운 실천이 또한 어디를 향하고 있을지 기대되는 시간이다.
¹파커 J. 파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 김찬호 옮김 (파주: 글항아리, 2012).
Art in Practice after Sewol Ferry Disaster
siren eun young jung
“It will be cloudy across the country with rains in many places in the southern regions.”
Those were the words formed by the immaculate cut–up strips of metal foil neatly arranged on the window. Then the sky gradually grew darker, and it really began to rain. As the raindrops began to glide down the glass window against the sullen scenery outside, the overlapping sentence took on an uncanny meaning. I found myself reading the same sentence over and over again.
“It will be cloudy across the country with rains in many places in the southern regions.”
It happened on April 9, during the exhibition in commemoration of the 5th anniversary of the Sewol Ferry Disaster, held in Seoul. Unlike the opening ceremonies of other exhibitions, the aura inside was as somber as the rainy outdoors. It was a venue where people laboriously tried to speak again of a disaster; where people strove strenuously to remember the disaster, lest they forget; where people called for the remembrance and grieving of this tragic loss instead of carrying on with everyday life. The exhibition served as a reminder that even the system of representation of ‘Art’ had come to face the painful disaster and loss of a specific event, i.e., the sinking of MV Sewol. In such context, the above sentence became more than a prose of weather forecast. In summoned the day of tragedy to the present, serving as a political statement that awakens a certain sadness from the abyss and thereby encouraging us to act. It gradually transformed into a sentence of deliberation, presenting us with the way ahead for such politics of sorrow.
Titled Tomorrow’s Weather (2019), this work was placed across the glass windows of several exhibition spaces hosting the commemorative exhibition for MV Sewol. Each sentence was taken from the weather forecasts of the days when disasters similar to the sinking of MV Sewol occurred. Keem Jiyoung said that she once headed to Paengmok Harbor to better comprehend the startling, aphasiac silence that followed the tragedy of the Sewol ferry. Two seasons drowning in unknown fear had already passed since the incident by the time she visited the site. What she saw there, however, was not some extraordinarily ruthless sea that massacred hundreds of lives. Rather, the sea was the same sea we always knew. The lazily shifting breeze carried the salty scent of the water, while the waves repeatedly crashed to create a rhythmic sound. Beautiful sunlight scattered across the surface of the water. Keem found it strange that the sea remained as tranquil and beautiful as ever even after such an agonizing tragedy. She logged the weather of each day and continued to paint the sea. She recorded the overcast days that followed sunny mornings, the snowy or rainy days, how the sky gradually grew cloudy only to clear up again, the sultry or freezing temperatures, the bright and quiet sea, and the dark and terrifying sea, the waves that continuously moved about and changed, the breeze that drifted atop the sea every day. Keem painted the subdued, sorrowful cries of the lives submerged on the seabed.
As Keem stared into the immutable sea at Paengmok Harbor, she decided to follow a single calling: to represent and refuse to remain silent or make compromises. In her first project Song Unable to be Good (2015, Samuso CHAGO), Keem readily chose “non–goodness (unethicalness)” in defiance of the Adornoan argument that it is unethical to represent another person’s agony (“To write poetry after Auschwitz is barbaric”). It was around this time that the increasingly desperate struggle of the families of the Sewol ferry’s victims became more agonizing by the day. Rhetoric about the ferry’s sinking and its victims often reached startling levels of provocativeness. Even amidst such sociopolitical turmoil, Keem courageously suggested, in her first solo exhibition Tilted Land Even Wind (2015, O’NewWall E’Juheon), that the duty of the artist must be derived from ‘representability’. Keem recorded the daily wind speed since the tragedy and turned them into drum beats [Wind (2015)] that thump like the pulse of the living. A waterdrop glides against a dangerously slanted floor [Floor (2015)], finding its way atop a cheek, becoming a teardrop. There is a black sea packed with charcoal powder [Wave (2015)], while a face quietly keeps its eyes closed [Sleep (2015)]. Such works allow us to contemplate about how fair death is, in that all human beings must one day die. Through this, we begin to sense that ‘mimicry’―which has long served as the roots of art―is finally expanding into ‘re–presentation’.
Keem’s penchant for such representation continued into the Blue Series that began in 2016, and became uncompromisingly resolute in her second solo exhibition Wind Beyond the Closed Windows (2018, Sansumunhwa). Leaving behind intense traces of friction with thousands of bold oil pastel strokes across the paper, Keem patiently portrayed the landscape of disaster. She dug deep into the dusty archives that remain as rough and blurry images, trying to dig up materials she hopes could shed light on the structure of this repetitive disaster. Keem thus collected and ruminated over the data over and over again. All this nearly obsessive behavior was made manifest in the way Keem moved her hands to draw the picture. Sometimes she would press firmly, and other times, lightly glide over the surface, creating forms and volume with the sensation in her hands. She builds layers after layers, and finds the weighty sentimentality of the oil pastel shine colorfully at the most unexpected moments, eliciting a resounding resonance within oneself. One cannot simply disregard the responsibility of the artist who never fled from these painful images. The paradox of having to face agony in order to represent such agony must have never been easy for Keem. Such relentless determination for representation would manifest in the monotonic paintings of blue, a color that acutely re–presents us with both the symbol of ‘hope’ and ‘depression’.
Keem’s works strongly tend to represent the sensation of agony experienced by the marginalized and the unjust social structures that lead to such painful consequences. Diligently reconstituting the methodology for representation is as important to Keem as the investigation of the dynamics behind a disaster. Through tenacious efforts to clearly remember every single incident that she comes to face, Keem spends time in self–introspection in active response to the sadness that rattles the incident from the inside and out. Notwithstanding the sad emotions, Keem still rises to the occasion to formulate “The Politics for Sorrowful People”.¹ That is what Keem must have been striving to approach in her incessant pursuit of representation.
Then what does it mean for this relatively ‘new’ artist to live in this age of disasters, when she should be busy solidifying her own style as she launches her artistic career? The metaphor of the sinking ship, the endlessly wavering image of water, and the image of students in uniform have undoubtedly come to hold different meanings compared to the period prior to the Sewol Ferry Disaster. In this age where customary metaphors often become counter–ethical while tranquil images unexpectedly become political, could Keem’s practice then become a valid pursuit of the categorical imperative of ‘ethical representation’? Will Keem be able to reassemble and advocate the ethics of representation for the sake of those who must continue to live on despite the pain, i.e., ‘the ones left behind’ the disaster who are now also the primary grievers? It would be fascinating to see where Keem’s new practice heads next.
¹Korean translated title of: Parker J. Palmer,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 The Courage to Create a Politics Worthy of the Human Spirit, (Bay Area: Jossy–Bass, 2011).
이미지를 부수는 힘
김선옥
기울어진 땅을 밟고 나서
3년 전 12월의 어느 날, 김지영의 개인전 ⟪기울어진 땅 평평한 바람⟫(2015, 오뉴월 이주헌)을 보러 갔다. 그날은 겨울의 어느 추운 보통 날 중 하루였고, 전시를 보러 가는 것은 나의 일상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러나, 전시를 보기 시작하면서 나의 기억에서 빗겨 나기 시작한 세월호가 떠올랐다. 그 사건을 내가 한동안 잊고 지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그 사실이 순간 끔찍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결국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잊혀지고 지나간다는 진부한 말이 맞는 것일까 생각했다. 기울어진 땅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전시장에 들어갔을 때 바닥의 가파른 경사가 눈에 들어왔고, 그 아래 쏟아져 내린 메마른 화분들 앞에서 내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무력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옆에 걸린 검게 울렁이는 파도 그림을 보고 있으니 세월호 사건 발생 당시에 느꼈던 절망감이 다시금 생각났다. 김지영의 전시를 본 후, 나는 잊고 있던(혹은 잊고 싶었던) 것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2014년 4월. 그 후로 벌써 4년이 흘렀다. 망각에 몸부림쳐도 흐르는 것이 시간이다.
한국 사회 구조의 취약성이 그대로 드러난 세월호 참사는 제도적 모순의 총체적 몰락이었다. 사후 미흡한 처리방식마저 큰 문제로 대두되었고, 대참사의 비극 앞에서 권력은 무능하고 무책임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세월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강인도교 폭파 사건(1950),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1995), 씨랜드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건(1999),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2003) 등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발생한 대다수의 대형 참사들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닌 사람이 만든 재앙이다. 불행히도 폭력은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행해지고 있으며, 이것은 언제 또 되풀이될지 모르는 사회적 비극의 징후로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김지영의 작업은 동일한 패턴으로 출현하는 사회적 폭력의 근원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며, 그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한다.
김지영은 195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부 사건들을 소환하여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서로 대립하거나 동떨어진 것이 아닌 일련의 관계 안에서 설명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우리가 사회의 사건들을 접하게 될 때 먼저 마주하게 되는 이미지의 환영을 부수고, 여기에 가려져 있던 대상의 실체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기를 시도한다. 이것은 사회학자 김홍중의 표현에 따르면, '파상력(破像力)이라 규정할 수 있으며, 즉 부재하는 대상을 현존시키는 힘인 상상력과는 반대로, 현존하는 대상의 비실체성 혹은 환각성을 깨닫는 힘이다.¹ 김지영의 작업은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고, 사회적 기억을 통해 이미지를 생산한다. 대형 참사를 다루는 대다수 언론은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것보다 드라마틱한 소재에 집중하여 자극적이고 과장된 이미지를 내보낸다. 이 이미지에는 사건의 비극성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스펙터클만 존재할 뿐이다. 김지영은 여기서 ‘파괴자’가 된다. 이미지에서 스펙터클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반면, 은폐된 사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려는 작가의 시도는 기존의 이미지를 와해시키고, 재배치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다시 보기’와 ‘다시 읽기’
사회는 우리가 ‘봐야 할’, 그리고 ‘읽어야 할’ 모든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 김지영이 선택한 일련의 사건들은 이미지와 텍스트로 재구축된다. 때로는 사람의 부주의나 고의적 의도에서 비롯된 사건들일지라도, 이 대형 참사들의 중요한 발생 원인은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문제였다. ‘개인’은 여기서 죄인이 아니다. 이것이 〈파랑 연작〉에서 사람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여, 우리가 그 사건의 상황에 집중하도록 만든 이유이다. 한편, 이번 전시에서 새로 설치된 구조물을 통해 그림이 배치되는 방식은 평면의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대상을 새롭게 의식시키고, 입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함으로써 사건을 재조명하려는 시도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사물화된 이미지들은 철저히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읽힐 수 있는 존재로서 작동하게 된다.
〈닫힌 창 너머의 바람〉은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 실제 일기예보로 시작한다. 역사에서 반복되어 온 비극적인 날들은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구름이 많고 흐리거나, 혹은 화창하고 맑거나, 우리의 일상적인 날씨처럼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비극을 경험하게 되는 것 또한 그 누구도 피해갈 수도, 선택할 수도 없는 것으로, 희생자는 내가 될 수도, 내 주변의 누군가가 될 수도 있는 아주 보편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사회적 사건들이 그저 과거의 역사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비극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용과 편집의 과정을 거쳐 재배치된 김지영의 텍스트 작업은 몽타주적 글쓰기로 볼 수 있다. 〈닫힌 창 너머의 바람〉에서 작가는 과거에 사건을 다뤘던 실제 기사들을 인용하되, 자극적이고 과장된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각 사건을 현재의 맥락에서 재구성하였다. 따라서, 이 텍스트는 진실을 은폐하거나 혹은 사건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폭력을 왜곡해서 쓴 보도기사를 해체하여, 객관적 상황을 바탕으로 폭력의 이면을 드러내려는 태도로 재서술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사건의 본질을 독해할 기회를 제공하며 한국 근현대사의 기록으로서 기능한다. 이것이 미술의 또 다른 작동방식이다. 작가는 사건을 다시 그리고, 다시 쓰는 행위로 과거를 소환하며 우리의 기억을 돕는다. 기억 속으로 사라져가는 역사는 다시 보기, 그리고 다시 읽기의 행위를 통해 망각에서 멀어진다.
김지영은 미술이 과연 여기서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 재차 되물으며 그것이 소재주의로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스스로 경계한다. 작업으로 담아내는 모든 것들이 단지 미술의 언어로 보여주기 위한 재현의 수단으로써 전락해 버리지 않도록, 타인의 고통을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그것에 대해 다시 말하기를 시도하기 위해 우리는 모두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스스로 의심해야 한다. 예술에서 재현이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시 상상할 수조차 없는 폭력의 충격을 환기할 때, 되풀이되는 고통이 비윤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 당위를 (감히) 누가 누구에게 어떤 자격으로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이러한 이유로 예술이 표현하고 실천하기를 머뭇거려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의도적인 무관심과 냉소적 태도야말로 가장 비겁한 도피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풍경
재현의 체계 안에서 생산되는 이미지는 환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장 사실적으로 재현된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대상의 환영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이다. 그러나, 김지영은 이러한 허상의 이미지를 파괴하여, 대상의 본질을 새롭게 인식하고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파상력은, 상(像)을 지어내거나 그것을 변형하는 힘으로 이해되어 온 상상력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상을 파괴하는 힘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파상력은 일체의 가상이 가상임을 꿰뚫고 그 가상이 행사하는 환영적 위력을 분쇄함으로써 엄폐되어 있던 진상(眞相)을 간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² 이것은 현실의 고통을 포착하고 직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규명하는 힘이 될 수 있다. 환상에 의존한 이미지의 권능이 위험한 것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세계를 정말 그런 것처럼 꾸미고 기만할 가능성 때문이다. 그리고, 비정상적인 것을 마치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상태처럼 보이게 만들어 현실의 부조리와 사회적 균열을 은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지영은 이와 같은 이미지의 환영을 벗기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모순을 발견하여 사건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김지영이 그리는 풍경은 단순히 재현된 이미지가 아닌 ‘현재의 기록’이다. 〈파랑 연작〉은 얼핏 유화처럼 보이지만 오일파스텔로 그려진 풍경화이다. 2015년 작 〈파도〉에서는 목탄을 사용해서 그렸던 것처럼, 작가가 도구 대신 직접 손으로 종이 위를 묵묵히 더듬어가며 완성했을 그림은 과거에 일어난 비극의 폭력을 현재 손의 감각으로 다시금 마주하기 위한 시도일 것이다. 그녀의 손을 통해 비극의 장면은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되고, 이를 통해 우리는 현실을 다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단색으로 처리된 풍경화에 서린 정적인 고요함은 멀쩡한 건물과 다리가 무너지는 폭음의 순간을 역설적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뉴스와 신문에서 예전에 이미 접했을 과거의 이미지들과 무의식적으로 중첩되면서 그 사건들을 현재로 다시 소환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림 속 사건의 상황이 아직 현재 진행 중인 것처럼, 작가는 비극이 완전히 끝난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도 일어날 가능성으로 우리의 일상을 여전히 균열 내고 있음을 강조한다.
상상력은 현실을 외면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허구적으로 만들어내는 반면, 파상력은 희망의 근거를 현실의 불안과 두려움에서 찾아낸다. 가짜의 희망이 존재하는 기존의 체제와 질서를 붕괴하고 현실을 마주할 때 비로소 희망의 가능성이 발현한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재난과 사건들을 목격하면서 침묵이 무책임한 표현방식이라는 것을 학습적으로 깨달았다. 폭력에 저항하기 위하여 어떤 방식으로도 움직임을 지속하고, 기록해야만 했다. 이것이 동시대에서 미술이 의무적으로 작동해야 하는 필연적 이유 중 하나이다.
김지영이 다루는 것은 정치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정치・사회적 이슈가 아닌, 생존이 걸린 삶의 본질적 문제이다. 당장 오늘, 나와 나의 주변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개인적 비극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사회적 사건이 개인의 서사를 파괴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미술의 언어를 통해 발언하는 것은 우리가 현재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또한, 오늘날과 같은 재앙의 시대에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중요한 행위가 될 수밖에 없는 애도의 움직임이다. 이것은 문영민이 언급한 것처럼 예술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시와 예술은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것이 아니라 삶의 기본요소이어야 하며 누구에게나 접근이 용이해져야 한다. 정치적인 것은 예술이 예술일 수 있도록 가능케 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정치적인 것은, 세계는 왜 이렇게밖에 될 수 없는가,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기 위해 안정된 것으로 보이는 모든 현실체제를 질문시하고 문제삼는 것”이기 때문이다.³
닫힌 창을 열 때쯤
창을 열기 전에는 바깥에 바람이 어떻게 부는지 결코 알 수 없다.
김지영은 폭력을 외면하려는 빗나간 시선들을 바로잡고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설령 공포에서 오는 외면이라 할지라도, 그 공포를 응시하도록 시선을 붙잡는다. 그 폭력에 복종하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이야기한다. 고통에 공감하고 죽음을 슬퍼하는 것을 넘어 진실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살아있는 자들이 할 몫이다. 그리고, 이것이 김지영이 애도하는 방식이다.
실은 뜨개질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니트가 된다. 그리고, 완성된 니트의 반대 방향으로 올을 풀면 니트는 다시 한 줄의 실로 돌아간다. 〈기억의 자세〉에서 니트는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뜨개실이 풀리면서 전시가 끝나는 순간 니트는 처음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실타래는 부피가 늘어나 있을 것이다. 인식하지 못할 만큼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실이 풀리는 모습은 우리가 비극을 조심스럽게 마주하는 모습과 닮았다. 본래 아카이브는 역사적으로 공중의 실에 매달아 놓은 보관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 가닥의 실에는 모든 시간과 역사가 축적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기억의 잔상은 점점 희미해진다. 그러나, 니트가 풀렸다고 해서 실타래에 감긴 실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역사는 우리가 의식하고 기억하는 한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어쩌면 잊지 말고 기억하는 것부터 애도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김지영은 아직 세월호를 그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 몇 년이 더 지난 후에 세월호를 그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때는 파란색이 아닌 다른 색을 사용하고 싶다고 했다. 새로운 캔버스에 세월호가 그려질 때쯤이면, 어쩌면 남아있는 진상규명이 거의 끝나 있지 않을까.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작가는 세월호에 대해 애도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러나, 이것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 사건을 잊지 않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다짐에 가까울 것이다. 또한, 그녀가 시도하려고 하는 미술의 가능성일지도 모르겠다.
이른 봄이 갑자기 온 것만 같다. 김지영이 예전에 인용했던 오규원의 시 한 구절처럼, 마치 죽은 꽃대 위에 봄눈이 온 것만 같다. 갑자기 미래와 희망을 꿈꿔보고 싶은 용기가 불쑥 생긴다. 그런데, 지난 잃어버린 10년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이 봄을 아직 즐기기도 전에 봄이 끝나버릴 걱정에 벌써 불안하기만 하다. 그리고, 지금 여기 닫힌 창 너머에는 여전히 바람이 분다. 우리가 창밖의 풍경을 무의식적으로 바라보는 일상적인 행위처럼, 작가는 우리 사회에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폭력의 이면을 우리가 무관심하게 지나치지 말고, 잊지 말고 기억해 주기를 바랄 것이다.
¹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pp.180–181.
²앞의 책, pp.191–192.
³문영민, 「한국현대미술의 비평적 실천」, 『사회 속 미술–행복의 나라』, 서울시립미술관, 2016, p. 79.
Power of Destroying the Image
Kim Seonok
After a Step into the Tilted Land
One day in December three years ago, I went to see Keem Jiyoung’s solo show Tilted Land Even Wind (2015, O’NewWall E’Juheon). It was another cold winter day and going to see a show was nothing out of the ordinary. However, as I stepped in I was reminded of Sewol ferry which was starting to slip my mind. Realizing how I had carried on without thinking about the incident for a while was in itself horrible. At the same time, I wondered if we really do forget things and manage to move on with time as people say. As I carefully stepped on the tilted land to enter the gallery space I noticed the steep slope of the floor. Dead plants in pots had slid down on the bottom of the slope, reminding me of the sense of helplessness that I'd left behind for some time. As I saw the swaying black waves that hung on the side, the despair I felt at the time of Sewol ferry incident came back to me. After Keem Jiyoung’s show, I came to encounter what I had been forgetting (or what I so longed to forget) once again.
April of 2014. Four years have passed since then. Time passes despite the struggle against forgetting.
Sewol ferry disaster disclosed the vulnerability of the Korean social structures and was itself a total collapse of the institutional contradictions. Insufficient countermeasures after the accident came to the fore as a big issue, demonstrating how the authority was incompetent and irresponsible in the face of the tragic catastrophe. This is not only a matter of Sewol ferry disaster. A series of calamities in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such as Hangang Bridge bombing(1950), Sampoong Department Store collapse(1995), Sealand Youth Training Center fire(1999), and Daegu Metro fire(2003) are not simple cases of natural disasters. They were man–made catastrophes. Unfortunately, violence is witnessed everywhere in this society and it is shown repeatedly as a symptom for social tragedies that may reiterate itself anytime. Keem Jiyoung’s works start from an interest in the origin of social violence that occurs with the same pattern, focusing on the invisible that lies behind it.
Keem Jiyoung invokes a few incidents that have actually happened in Korea since the 1950s and proves how the problem of the individual and those of the society are neither conflicting nor removed but comprehensible within a line of relations. In order to elaborate on this point, the artist tears down the phantom of the images that we encounter in the face of social incidents, and attempts to show the true nature of the thing that used to be covered in those images in a different way. This could be defined as, according to Hong–Jung Kim, ‘pa–sang–ryok’, which is the capacity to recognize the fantastic characteristics of the present objects as opposed to imagination which is the capacity to make absent objects present.¹ Keem Jiyoung produces images through based not on imagination but on social memories. Most of the time, when it comes to dealing with a major catastrophe, the focus is on dramatic issues, sending out provocative and exaggerated images. In these images, there are only exist spectacles to dramatize the tragic aspect of the event. Here, Keem Jiyoung becomes a ‘destroyer’. On the one hand, she excludes the spectacles from the images on purpose while on the other attempting to actively put forth the hidden truth that disrupts the given images, and reorganizing them to come up with a new significance.
‘Re–viewing’ and ‘Re–reading’
The society does not provide everything that we should be ‘viewing’ or ‘reading’. A group of events chosen by Keem Jiyoung are reconstructed in images and texts. These incidents may have been triggered at times by an individual’s carelessness or intentions. The imperative cause of these catastrophes lies in social structures. Here, the ‘individual’ is not the one to take the blame. This is the reason why individuals are intentionally excluded in Blue Series―to concentrate on the conditions of the incident. Meanwhile, this exhibition presents newly installed structures to organize the paintings, showing the flat images in a different way. Such gestures make it possible for the objects to be recognized anew as an attempt to shed an original light on the events through varied perspectives. The images that are objectified in their own positions function as beings that could be re–read thoroughly from the present.
Wind Beyond the Closed Windows begins with the actual weather forecast of the day of the event. Tragic days in history that repeated themselves were like any other days of the year with ordinary weathers―rainy, snowy, cloudy, or bright and shiny. The one to suffer might as well be me or anyone around me; experiencing the tragedy is unavoidable and you have no choice as it is a fairly universal event. This means that the social events that the texts deal with are not terminated as the history from the past but are tragedies that are still on–going.
Keem Jiyoung’s text work, reorganized through quoting and editing, could be considered a kind of montage writing. In Wind Beyond the Closed Windows the artist quotes actual articles that dealt with the events of the past but by deleting provocative and exaggerated parts on purpose and reorganizing each event in the context of the present. Accordingly, this text deconstructs the news report that distorted violence to cover up the truth or dramatize the incident, and rewrites it based on objective situations with an attitude of uncovering the other side of violence. This text functions as a record of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while providing a chance to read through the essence of the events to which we had no access before. Such is another way that art works. The artist re–paints and re–writes the incidents to summon the past, assisting us in our act of remembering. History that fades away from memory is then distanced from oblivion through the act of re–viewing and re–reading.
Keem Jiyoung takes precaution against falling into the trap of merely consuming the subject matter by questioning again and again on how art could indeed work in this situation. We have to question ourselves constantly if we don’t want all the things we deal with in the work to fall into just a material of representation in showing them as an artwork but attempt to re–tell the stories without objectifying the pains of the other. Representation in art is bound to be controversial as the reiterated pain stirred when calling to attention the shock of unimaginable violence could be received as unethical. However, who could (dare) enforce such an ethical standard to someone else? If this is the justification of making art hesitate to express and engage, that is nothing more than another form of violence. It is intentional indifference and cynicism that demonstrate the strongest weakness.
The Scene of Here and Now
Images produced within the system of representation are bound to be a phantasm. Thus, the image with the most detailed portrayal of facts is paradoxically the one closest to the phantasm of the object. However, Keem Jiyoung destroys the image of phantasm, creating a space to realize anew and deliberate on the essence of the object. “Pa–sang–ryok is basically a power that destroys the image unlike imagination which was understood as a power that creates an image or transforms them. To be more exact, pa–sang–ryok is a capability to realize that all images are merely images and to seize the real figure that has been suppressed by pulverizing the phantasmal power that the image exerts.”² Such a power could not only be one that captures and faces up to the pain but one that investigates into the hidden truth that lies beyond the image. The power of the image that depends on the phantasm is dangerous because there is a potential of deceit, pretending a world that is not so as if it is so. Also, it could make something abnormal look as if it is reasonable and normal, suppressing the absurdity of the reality and the social rift. What Keem Jiyoung is doing so to uncover such a phantasm of image and identify the existing contradictions from the other side to raise a fundamental question on the event.
Therefore, the scenes that Keem Jiyoung portray are not simply represented images but are ‘records of the present.’ Blue Series looks like oil paintings at a glance but they are oil pastel landscape paintings. Just like in Wave from 2015 which was drawn in charcoal, the artist must have worked through the paintings not with a tool but with her hands, fumbling around the paper. The paintings must be an attempt to encounter the tragic violence of the past once again with the touches of the hands. Throuch her hands, the scene of the tragedy becomes a familiar landscape and through it we could take a grasp of the reality once more. The landscape paintings in single color embody a static silence, embracing the moment of explosion where solid buildings and the bridge fall down in a paradoxical manner. Also, it is unconsciously overlapped with images from the past that we might have encountered from the newscast or the paper, bringing back those incidents to the present. As the incidents from the paintings are still ongoing, the artist underscores that the tragedy is not entirely finished as something of the past but is still opening up fissures in our daily lives as a possibility in the future.
While imagination creates fictitious hopes for the future in disregard for the reality, pa–sang–ryok discovers the grounds for hopes from the anxiety and fear of reality. It is when we finally face reality in the collapse of the given system and order where fake hopes lie that the potential for hope is finally realized. Witnessing countless disasters and incidents so far have taught us that silence is only an irresponsible remark. Movements should continue and be recorded in any way possible to stand up to violence. This is one of the necessary reasons why art in this age should carry on an obligation.
What Keem Jiyoung deals with may be something political. However, it is not merely some political or social issue that is at stake; it is about essential questions of life on which survival depends. It is about something that could potentially be a personal tragedy for me or those around me right now; a social event could just as well be destructive of an individual’s narrative. Thus, what she addresses through her language of art is about the fundamental questions about the world that we are stepping on, as well as the gesture of mourning that is bound to be imperative in remembering history in the age of disaster like these days. This is also why art cannot help but be political as Young Min Moon mentioned: “Poetry and arts are not luxury but basic ingredients of life that should be accessible for all. The political is the most basic condition that enables art to be art. The political has to do with asking oneself: could the world be better than this? It involves questioning and problematizing all the systems in place that appear to be stable, in order to envision a better world.”³
When It’s About Time to Open the Closed Windows
We would never know how the wind blows outside unless we open the window.
Keem Jiyoung straightens the crooked perspective that try to look away from violence and makes it possible to face the reality. Even if the disregard is derived from fear, she grabs hold of the perspective and invokes a gaze upon such a fear, urging us to think for ourselves and take action instead of submitting to violence. The obligation of the living is to look at the truth beyond sympathizing with the pain and grieving death. And this is exactly how Keem Jiyoung mourns.
Thread is knitted into various forms of knitwear. When you undo the knitting, the garment returns to a line of thread again. In Attitude Toward Remembering, the knitwear is untied from top to bottom or bottom to top, leaving the garment in a very different state at the end of the exhibition compared to the very beginning with the skein getting thicker with time. The way the thread unravels in a speed so slow that the movement is hard to notice is similar to the way we approach the tragedy with care. Historically, an archive began from the storage objects that were hung on strings. In a single strand of thread lies the accumulation of all the times and history. As time passes, the afterimage of memories keeps fading away naturally. However, an unwoven knitwear doesn’t imply the disappearance of the thread in the skein; history will exist as it is as long as we are conscious of it in recollection. Perhaps not forgetting and remembering is the beginning of mourning.
Keem Jiyoung hasn’t painted Sewol ferry yet. She said she might be able to do it a few more years later. And when the time came, she said, she would use not blue but another color. By the time Sewol ferry is painted on a new canvas, maybe the truth yet to be revealed would finally show its face. Then, perhaps, the artist would be ready in her heart to finally mourn for it. However, this is probably closer to a kind of a resolution to never forget about the incident over time. And this might be the potential of art that the artist is striving to realize.
It seems like early spring has turned up. Just like a phrase from Kyu–won Oh’s poem that Keem Jiyoung has once quoted, it seems as though the spring snow sat on a dead flower stalk. Suddenly, the courage to envisage the future and hopes springs up. Yet the past ten years we have lost were indeed too long; we are already worried if the spring would come to an end when we never even had a chance to enjoy it. And here, beyond the closed windows, the wind still blows. Like a mundane gesture of looking beyond the window, the artist is perhaps hoping that we don’t forget or neglect the other side of violence that still persists in the society but instead remind ourselves of it.
¹Hong–Jung Kim, Sociology of the Heart, Seoul: Munhakdongne, 2009, pp.180–181.
²Ibid., pp.191–192.
³Young Min Moon, “Notes on Critical Practices in Contemporary Korean Art”, Art in Society: Land of Happiness, Seoul: Buk–Seoul Museum of Art, 2016, p. 79.
오늘의 성장
손송이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예전에 사람들은 과일이 씨앗을 품고 있듯 자기 안에 죽음을 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고 썼다. 말하자면 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죽음을 예비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때로는 죽음이라는 식물을 감싸고 있던 장막이 조금 걷히고 그 이면을 우리가 엿보게 될 때도 있다. 김지영은 이번 전시에서 그 보편적인 죽음의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바다와 바람은 어떤 장막처럼 많은 사람들을 한 날 한 시에 가렸다. 출렁이던 수면은 이내 다시금 평평해졌다. 태연하고 고요하게. 그리고 두 발을 딛고 있던 땅은 각도를 달리하여 기울었다. 사람들은 기울어진 땅 위에서 한쪽 어깨가 들리거나 한쪽 다리를 비스듬히 놓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곤 했다.
실제로 ⟪기울어진 땅 평평한 바람⟫의 전시 공간 바닥에는 각도를 달리하여 기울기가 들어가 있다. 떨어지는 물과 조명 설치를 포함한 〈바닥〉 작업에서는 기울기로 인한 높낮이의 차이를 통해서 각각의 방들이 어떤 흐름을 가지고 서로 스미고 이어진다. 그리고 이 기운 땅들은 각각의 상태를 반영하는 어떤 지표나 은유 같다. 이를 테면 죽음이라는 식물이 만개한 순간을 직접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오늘의 성장〉에서는 바닥의 기울기가 가장 급격하며, 작가 스스로 감정적으로 격앙되어 죽음을 마주한 작업인 〈파도〉에는 그 기울기가 가장 완만하다.
전시 공간이 만들어내는 어떤 흐름 속에서 각각의 작업들은 작가에 의해 주관적으로 매개된다. 다시 말해 김지영은 작업 속 풍경이나 사건을 지시적으로 재현한다기보다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거친 풍경이나 사건을 드러낸다. 예컨대 종이에 목탄으로 그린 〈파도〉에는 그 파도에 대응하는 지시체를 찾을 만한 어떤 단서도 작품 내적으로 찾을 수 없다. 그저 모든 것이 숨을 참고 있는 것 같은 정지된 순간에, 수직으로 세워져 언젠가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악천후의 파도가 거기 있을 따름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작가가 손에 세게 힘을 주어 그린 나머지 군데군데 종이가 벗겨진 부분들도 보인다. 이는 그녀가 대상과의 객관적 거리두기를 짐짓 시도하기보다 대상이 처해 있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야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의 구조적 폭력 내지는 폭력적 구조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그 발화의 여러 형식이 진부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기저에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부각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보는 일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쉽지만은 않다. 어떤 사안에 대한 발언하는 일 자체가 정치적 이용의 혐의를 받곤 하는 이 수상한 시절에, 그럼에도 그 이야기를 하겠다고 결심한 한 젊은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의 몸으로 꾸준하게 시간을 견디며 그것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갤러리 현대의 윈도우갤러리에서 전시(2015.5.27–6.22)되었던 김지영의 〈4월에서 3월으로〉는 달력 형식으로 종이에 매일의 파도 한 조각을 연필로 그려 선적인 시간축 위에서 일 년 동안의 공간을 기록한 작업이다. 숫자는 소거되고 그리드 안으로 무늬가 서로 다른 물결들이 가득 들어찼다. 작품명을 ‘4월에서 3월로’가 아니라 ‘4월에서 3월으로’라고 의도적으로 잘못 기입한 것도 이상했던 지난 일 년을 마주하는 작가의 심정이 반영되어 있다. 매일의 풍속 또한 〈바람〉에서 일 년 동안 기록되어 북소리로 전환된다. 풍경과 소리를 매개로 매일 긴 기간 동안 그 사건을 체화하려 시도함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벗어날 수 없는 어떤 물리적 취약성으로서의 폭력을 이해하게 되고, 그런 다음에야 그녀는 자기검열과 나르시시즘적 죄의식에서 얼마간 조심스럽게 거리를 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로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제 서야 비로소 ‘자신의 북소리’를 따라 성큼성큼 걸음을 앞으로 내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부분과 전체의 상호적이고 다층적인 관계에 대한 서술은 이번 전시를 관통하고 있다. 달력 속 바다들은 조각보처럼 시간축 위에 서로 이어져 있으며, 멀리 퍼지는 북소리는 전시장을 가득 채운 공기에 물결 비슷한 여러 떨림을 만든다. 사회 속에서 미술을 하는 개인이 할 수 있는 혹은 해야만 하는 역할에 관한 작가의 질문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죽음과 보편적인 죽음이 배를 맞대고 있다는 이야기도 그러하다.
여러 번 얇게 칠을 하여 형태를 잡아간 스무 장의 초상작업인 〈수면〉에는 작가 자신과 그녀의 가족과 지인들 그리고 그 지인의 가족과 지인들의 잠든 얼굴이 그려져 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불그스름하거나 푸르스름하게 변한 낯빛의 여러 얼굴은 일견 익사체를, 그리하여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세밀하고 명확하게 묘사된 얼굴의 부분들을 보고 있으면, 레비나스가 『어려운 자유: 유대교에 관한 논집』의 「윤리학과 정신」에서, 얼굴이 ‘인간의 몸에서 가장 벌거벗은 부분’이기 때문에 살인에의 욕망과 동시에 살인이 불가능하게끔 하는 저항을 이끌어낸다고 말한 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자기방어를 목적으로 살해하고 싶어지는 타자의 얼굴은 자신에게 호소하는 얼굴이고, 거꾸로 자신이 박해자가 되지 않게 하는 얼굴이 된다. 이 초상작업에서 다양한 시선들 역시 시차를 두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즉 우리는 작가와 작가의 가까운 지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주함과 동시에 그들이 자는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한, 그들과 가까운 다른 누군가의 시점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작가에 의해 재매개된 시선과 전시를 보러 온 다른 이들의 시점도 같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기울어진 땅 평평한 바람⟫은 이 다층적인 연결을 발화하는 하나의 ‘문장 구조’이다. 먼저 전시장에 들어서서 눈을 감고 어둠을, 떨어지는 물소리를, 심장박동과 유사한 북소리와 바닥의 기울기를 느껴보자. 그런 다음 눈을 떠 바다와 바다를 둘러싼 맥락의 변화를, 분명하게 식별 가능한 얼굴들을 자세히 살펴보자. 마지막으로, 작가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랜 시간을 두고 이 문장을 천천히 발음해보자. 그럴 경우 이 문장의 의미가 가장 덜 오해될 것이다.
Today's Growth
Songyi Son
Rilke wrote in his book The Notebooks of Malte Laurids Brigge that “before people knew that they had death inside them like the seed inside a fruit”. In other words, people are preparing for death from the moment they begin their lives. Sometimes we are able to see the other side of death when the curtain wrapping the death plant is partly lifted. In this exhibition, Keem Jiyoung would like to talk about that universal potential of death. Like a curtain, the ocean and wind covered many people all at once. The surging surface soon became smooth. It became calm and still. The land where we lay our feet, changed its degree and tilted. On the tilted land, people stood in a half–risen way with one shoulder up or one leg aslant.
In fact, the exhibition floor of Tilted Land Even Wind has been tilted with different degrees. In the artwork Ground including falling water and light installation, the rooms soak in and connect to each other with a kind of flow through the different degrees of the slope. These tilted lands are like an index or metaphor reflecting each of its situations. For instance, where the we can directly witness the moment when the death plant fully blooms in Today's Growth, the slope of the floor is sharpest. The slope of the floor where Wave is, is most gentle; Wave is a work in which the artist faced death with overwhelming emotions.
The artworks are subjectively mediated by the artist in some flow that the exhibition space created. In other words, In other words, Keem Jiyoung does not directively reproduce a landscape or happening in her work; rather she exposes a rough landscape and happening through her personal experience and memory. For example, inside Wave(charcoal on paper), there is no clue of what the wave is referring to. There is merely a wave, one we can see in a foul weather, that looks like it will pour down on our face standing vertically, during a suspended moment when everything seems like it is holding its breath. If we look close enough, we can see the paper is peeled here and there because the artist drew hard. It can be said that this is not simply an attempt to objectively distance herself from the object; it is more of an expression of her will to accept and talk about the situation the object is laid in.
Yet, this is not easy because the many forms of speaking of society's structural violence or violent structure are considered outdated, and because there is an underlying demand to ask back whether the artist is using ‘other's pain’ in order to emphasize oneself. In a strange time when one can be suspected of political exploitation for speaking of an issue, the young artist nevertheless is determined to talk, and the only thing she can do is to steadily bear the time with her body, to remember it and to record it. Keem Jiyoung’s From April into March which was exhibited in Gallery Hyundai’s window gallery from 27th of May to 22nd of June 2015, is a work of art in which the artist drew a piece of wave of each day with pencil like a calender; she recorded the space on a linear time base for a year. Numbers are erased, and the differently patterned waves fill in the grid. The title of the work, which is intentionally entered incorrectly as “From April into March”, not “From April to March”, portrays the artist's feelings of encountering the past year. Everyday's wind speed is also recorded for a year in Wind and converted into drum sound. By attempting to feel the case in person everyday for long periods of time through landscape and sound, she understood the violence that we alone cannot escape from, as a kind of physical weakness. Only then was she able to carefully distance herself for a while from self–censorship and narcissistic sense of guilt. To borrow Thoreau’s expression, at last for the first time, she was able to step forward to ‘the drum sound which she heard’.
To sum up, a description of the mutual and multilayered relationship of the parts and whole is penetrating this exhibition. The oceans in the calendar are linked to one another on a time base like scraps of cloth, and the drum sound spreading after makes many vibrations like a wave on the air filling the exhibition space. Not only the question regarding the role of an artist, of what one individual could or should do in society, but also the story of the confrontation of individual and universal death are both dealt in this exhibition.
In the twenty–page portrait work Sleep, formed by thinly painting many times, are asleep faces of the artist herself, her family, friends, the family of her friends and the friends of her friends. At a glance, the many faces with tangled hair, reddish and bluish face color, recalls drowned bodies, and therefore recalls death. When looking at parts of the elaborately and clearly depicted faces, we may be reminded of what Levinas said in his “Ethics and Spirit”, in Difficult Freedom: Essays on Judaism; because the face is the most naked part of the human body, it simultaneously draws the desire to kill and the resistance that makes killing impossible. The other’s face, which is a face that makes us want to kill due to self–defense, is also a face that appeals to us and in reverse is a face that does not make us an oppressor. The various gazes in this portrait work are connected to each other as well with the difference of time. That is to say, we face the artist and her close friends one by one and at the same time experience the perspective of those who photographed them asleep. Moreover, we are able to experience the remediated perspective of that artist and the perspective of the people here to see the exhibition.
Tilted Land Even Wind is a ‘sentence structure’ that verbals this multilayered connection. Let’s first enter the exhibition space, close our eyes, and feel the darkness, falling sound of water, the drum sound like a heart beat and the slope of the floor. Then let’s open our eyes, see the sea and the change of context surrounding the sea, and closely examine the clearly distinguishable faces. Finally let’s open our mouths and take our time in slowly pronouncing this sentence, just as the artist did. Then the meaning of this sentence will be least misunderstood.